18일 현재 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제인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주요 경제단체들은 배임죄 폐지와 관련해 공식 논평을 내지 않았고, 낼 계획도 아직 없다. 이 원장이 지난 14일 ‘깜짝 제안’을 한 지 나흘이 지났지만 입장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배임죄 완화가 아닌 폐지까지 언급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 당황했다”며 “정부의 공식 입장인지도 확인되지 않아 논평을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오랫동안 배임죄 폐지 또는 완화를 요구해왔다. 글로벌 시장서 경쟁하는 기업의 경영자들은 신속한 판단과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배임죄 부담이 족쇄로 작용한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 형법상 배임죄 및 업무상 배임죄, 상법상 특별배임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상 배임죄 규정을 두고 강하게 규제하고 있다.
대한상의·한경협 등에 따르면 한국을 비롯해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주요 6개국 중 미국과 영국은 배임죄 처벌 규정이 없고 사기죄나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다룬다. 배임죄를 명문화한 4개국 중에서도 한국의 처벌이 가장 과도하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특경법상 배임죄는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을 선고할 수 있어 살인죄(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 수준으로 과하다는 지적도 꾸준히 나왔다. 배임죄의 구성 요건이 ‘임무 위배’ 등으로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그러나 재계는 배임죄 폐지와 별개로 정부의 상법 개정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다. 송승혁 대한상의 금융산업팀장은 “배임죄 폐지와 상법 개정은 묶어서 처리할 게 아니라 따로 다뤄야 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배임죄가 폐지 또는 완화되더라도 이사를 대상으로 한 민사소송 남발 우려는 여전하다”라며 “기업 입장에서 경영 불확실성을 키우는 이사 충실의무 확대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재계는 주주 모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어렵기에 배당과 대규모 투자, 전략적 인수합병(M&A) 등 어떤 판단이든 충실의무를 위반할 소지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한다.
현실적으로 배임죄 폐지가 쉽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야당에서 ‘재벌 봐주기’라는 이유로 반대하면 여소야대 국회에서 통과가 쉽지 않아서다. 익명을 요청한 재계 관계자는 “야당이 반발할 게 뻔한데 기업들이 섣불리 환영할 수 있겠느냐”며 “자칫 ‘딜’을 잘못 했다가 이사 충실의무 확대만 통과되고 배임죄 폐지나 완화는 물 건너가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오는 26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코스닥협회·한경협 주관으로 열리는 ‘밸류업 정책 세미나’에서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날 세미나에는 이 원장도 참석한다. 주요 주제로는 이사 충실의무 확대의 문제점과 상속세 인하, 경영권 방어수단 확보의 필요성 등이 다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