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장론은 잊힐 만하면 다시 튀어나오는 이슈다. 정치권이 요즘 핵무장론을 서랍에서 다시 꺼낸 이유는 최근 안보정세 때문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군사동맹 성격의 조약을 맺었다.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첨단 군사기술을 받아 핵ㆍ미사일을 한ㆍ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도화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툭하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대선의 유력주자다.
국민이 불안에 떨게 됐다. 그래서 핵무장론이 순풍을 타고 있다. 지난 2월 최종현학술원의 ‘북핵 위기와 안보상황 인식’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 1000명 중 76.6%가 독자적 핵 개발에 ‘필요하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72.4%는 한국의 핵 개발 능력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77.6%는 북한 비핵화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리고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 핵 억지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는지에 대해선 ‘그렇다’(51.3%)가 ‘그렇지 않다’(48.7%)보다 약간 높았다.
그러나 핵무장론에서 필요성만 부각되다 보니 정작 중요한 논점이 빠지거나 덜 다뤄지고 있다. 바로 비용 문제다. 여론 조사 문항에선 한국이 독자 핵무장에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핵무기 제조법은 비밀도 아니며, 한국은 충분히 만들 국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핵 비확산 조약(NPT)에 가입했다. 핵 비확산 국제 체제에 따르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금도 비핵일 때가 핵무장할 때보다 한국이 얻는 게 많고 잃는 게 적다.
한 해 핵무기에 최소 2조원 이상 써야
우선 실제 비용부터 따져보자.
미국 에너지부·미국 과학자연맹(FAS)·스톡홀름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 9600개가 넘는 핵탄두가 있다. 러시아(4380개), 미국(3748개), 중국(500개), 프랑스(290개), 영국(225개)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5개국(P5)은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나머지 4개국은 ‘비공인 핵보유국’이다. 인도·파키스탄·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를 알렸고,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핵무기는 비싸다. 핵무기폐기국제운동본부(ICAN)에 따르면 지난해 이들 9개국은 900억 달러(약 125조원) 이상을 핵무기에 썼다. 1초당 2898달러라고 한다. 북한만 하더라도 한해 9억 달러(약 1조 2000억원)를 핵무기에 쏟아부었다. 한국은 맨땅에 헤딩하면서 핵 개발하는 것이니 북한보다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핵무기 개발 후 북한에 맞서고, 중국ㆍ일본까지 견제하려면 프랑스ㆍ영국 수준은 아니더라도 인도ㆍ파키스탄 수준인 100단위의 핵탄두를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한해 얼추 20억 달러(약 2조 8000억원) 이상으로 핵무기 생산·유지·관리해야 한다.
일본, 재처리 시설 건설에 19년간 19조원
핵무기의 원료는 우라늄 또는 플루토늄이다. 그런데 한국이 이들 핵분열 물질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우라늄. 천연 우라늄은 핵분열이 잘 일어나는 우라늄-235 동위원소 조성이 0.72%에 불과하다. 그래서 농축 과정을 통해 우라늄-235 동위원소 조성을 90%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파키스탄이 개발하고 북한이 따라 한 방법대로 원심분리기에 우라늄을 넣고 고속회전해 고농축 우라늄을 얻을 수 있다. 원심분리기를 6개월 돌려야 소량의 고농축 우라늄이 나온다. 그래서 원심분리기 수천 개가 필요하다.
그런데 NPT 체제에서 많은 양의 우라늄을 수입하는 것은 어렵다. 한국엔 우라늄 광산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루토늄. 플루토늄은 자연에 없는 원소다. 원자력 발전에서 사용 후 핵연료에 1%가량의 플루토늄이 나온다. 사용 후 핵연료를 화학적 재처리해 플루토늄-239를 다른 동위원소와 분리해야 한다.
그런데 재처리 시설을 건설하려면 돈과 시간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안전 문제 때문이다. 일본 아오모리 현의 롯카쇼(六ヶ所村) 핵 재처리장은 1993년 착공해 2012년 준공했다. 첫 가동은 2013년. 각종 이유로 18차례 일정이 늦춰지고, 건설비는 2조 1930억엔(약 19조 8000억원)으로 불어났다.
핵무기 보관 장소는 핵 공격 1순위
어찌어찌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핵실험은 어디서 할까.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 핵실험장을 차렸다. 풍계리는 해발 2200m의 만탑산을 포함해 높이가 1000m 넘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북한은 화강암 암반을 뚫고 핵실험 지하 갱도를 팠다. 그런데도 방사능 유출 의혹이 나온다.
한국엔 풍계리만 한 여건의 장소가 드물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라 혐오 시설 유치를 반대하는 님비(NIMBY) 여론을 무시할 순 없다. 핵실험장을 반길 지방자치단체가 있을까. 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방폐장)도 짓지 못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시뮬레이션으로 핵실험을 대체할 수 있다. 또 핵무기의 위력을 외부에 보여주지 않고 핵 보유를 공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핵무기는 어디다 보관할까. 군 당국은 방호가 잘 된 군사 시설에 핵무기를 배치하려고 할 것이다. 또 미사일ㆍ전투기ㆍ잠수함 등 핵 투발 수단이 있는 군사 기지에 핵무기를 둘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시설과 기지는 북한의 핵 공격 제1 순위에 오른다. 냉전 때 미국과 소련은 상대의 대도시를 핵 타격 우선순위에 놓지 않았다. 핵 미사일 사일로, 전략폭격기 기지, 전략잠수함 기지, 통신시설, 핵무기 저장소 등 상대의 핵전력을 가장 빨리 때리려 했다. 그래야 상대가 핵으로 반격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무기 관련 시설은 유사시 대통령실이나 국방부, 합동참모본부보다 먼저 북한의 핵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이 가장 아파할 경제 제재 감수해야
한국이 독자적 핵무장으로 가려면 NPT에서 나와야 한다. NPT 탈퇴는 국제 제재를 의미한다. 북한은 핵 개발로 유엔은 물론 한국ㆍ미국ㆍ일본 등의 독자적 경제 제재를 받고 있다. 그래서 북한이 주요 수출품인 광물과 수산물을 팔고 인력을 해외로 보내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을 감행하면 국제 사회는 한국의 반도체ㆍ핸드폰ㆍ자동차ㆍ선박 등을 콕 집어 제재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는 쓰나미와 같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 충격의 강도는 1997년 외환위기보다 더할 수도 있다.
비핀 나랑 미 국방부 우주정책차관보가 지난 17일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핵무장론'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핵무기 추구가 NPT 위반이고 아마도 제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나오는 모든 놀라운 수출품들, 자동차, 삼성 휴대폰, 전 세계가 감탄하는 그런 것들이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인데도 핵 개발을 지지하겠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또 하루아침에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핵무기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죠.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에서 한국의 핵 개발에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은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일 것이며 본질에서 NPT를 위반하는 국제적 ‘왕따 국가’(pariah)가 될 것입니다. 핵무기 추구의 결과를 알게 되면 핵무기 추구에 대한 지지도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2003년 NPT를 탈퇴했다. 그리고 엄청난 국제 제재 속에서도 생존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뒷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경제가 근근하게 버텨나가는 것이지, 북한 인민이 풍족하게 사는 정도는 아니다.
이란은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경제 제재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 경제는 추락했고, 민생은 어려운 상황이다.
트럼프가 과연 독자 핵무장을 허용할까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미국이 한국의 독자 핵무장을 양해해야 한다. 최소 묵인해야 한다.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이 핵을 가진 뒤 미국은 처음엔 펄쩍 뛰었지만, 나중엔 슬쩍 넘어간 전례가 있다.
미국은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고, 파키스탄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필요했고, 이스라엘은 중동의 교두보라고 전략적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 세 나라는 NPT 가입국이 아니고, 미국의 동맹국도 아니다. 한국이 독자 핵무장을 한다면 미국은 한국이 한·미 동맹을 깨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핵무장론에서 ‘트럼프 변수’를 대입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한다면 한국의 독자 핵무장을 인정한다는 논리다. 특히 트럼프 진영의 인사들이 이런 해석을 부추기고 있다.
앨리슨 후커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지난 1월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웨비나에서 "우리는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으며, 어쩌면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난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 심화가 확실히 한국을 그런 방향으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할 경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ㆍ전력개발 담당 부차관보는 지난 4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미국 없이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며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까지 고려한 모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조야에선 후커와 콜비와 같은 목소리가 나오지만, 대세나 주류는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 대행을 지낸 크리스토퍼 밀러는 지난 5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핵무장 문제는 궁극적으로 한국 국민이 답해야 할 질문”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2016년 대선 유세에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허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집권 후 아무것도 안 했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폼나고 돈 되는 일만 골라서 하겠지, 폼도 안 나고 돈도 안 되는 일은 안 하려 들 것이다. NPT 체제의 대체와 그에 따른 핵전략 변경은 골치 아픈 일이다. 돈도 많이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트럼프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 교수는 “트럼프는 동맹의 팔을 비틀어 더 많은 돈을 갈취하기 원하겠지만, 동맹을 해체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떨어뜨리기 바라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모든 비용을 감수하고도 당장 핵개발?
결국 한국의 독자 핵무장은 NPT 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이 눈감아 주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그럴 전망은 희박하다.
대신 한국은 유사시 미국이 한국에게 확장억제를 제공하겠다는 보장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미 핵협의그룹(NCG)도 그런 노력의 하나다.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 대사는 지난 23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미국의) 자산이 북핵 억제를 위해 불러들일 수 있는 상태에 있게 됐다”며 NCG의 성과를 평가했다.
물론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한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를 감내할 수 없다면 생존을 위해선 핵무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일 안전해지려면 오늘 불편한 걸 견뎌야 한다”는 주장에 선뜻 공감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자, 독자 핵무장에 대한 여론 조사 질문을 이렇게 고쳐보자.
북한의 핵ㆍ미사일 고도화에 따라 독자 핵무장을 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핵무장은 한국의 안보를 지킬 수 있지만,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를 부르고, 한ㆍ미 동맹을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한국이 독자적 핵 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의 답변은? ‘매우 그렇다’? ‘그런 편이다’?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