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기 위해 포기하다
미국 본토를 출발한 증원군이 부산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는 한반도의 90%를 포기하는 대신 전선을 경상도 일원으로 대폭 축소해 방어선을 강화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1950년 8월 1일, 모든 아군 부대는 낙동강 방어선 안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뒤쫓아 내려온 북한군이 곧바로 부산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면서 200㎞에 이르는 전선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남침 이후 지금까지 조공이 정면을 견제하는 동안 주공이 옆으로 돌아가 배후를 타격하는 전술로 크게 재미를 보았던 북한군은 아군의 방어선이 촘촘히 연결되자 전진이 둔화했다. 우회 돌파가 불가능하니 북한군은 정면으로 공격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피해가 커졌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 서쪽의 마산-상주 간 140㎞는 미 3개 사단이, 북쪽의 상주-영덕 간 80㎞는 국군 5개 사단이 담당했다.
상당 지역이 폭 400~800m의 낙동강에 접해 있어서 방어에 유리했지만, 모든 곳이 그렇지 않았다. 산악 능선으로 연결된 낙동리-영덕 구간, 마산-남지 구간은 커다란 지형적 장애물이 없었다. 그래서 도하 능력이 부족했던 적은 이곳 일대로 돌파를 시도했다. 당시 북한군은 방어선의 한 곳이라도 뚫는다면 부산까지 곧바로 내달릴 수 있다고 보았기에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최종 목표인 부산이 지척이라고 생각해서 서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스스로 패배를 촉진한 자충수였다. 8월이 됐을 때 북한군 부대들은 서류상 병력의 30~50%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소모된 데다 예비대가 부족하고 보급로도 길어져 상당히 애를 먹던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워커의 의도대로 양측의 전력이 서서히 균형을 맞춰가고 있었다.
이처럼 분산 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의 오판은 대한민국이 백척간두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군도 학도병까지 동원해야 했을 만큼 예비대가 부족했기에 결코 방어가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포항·영천·왜관·다부동을 비롯한 곳곳에서 연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됐다. 그중에서 마산은 6·25 전쟁 당시에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서 명운을 건 격전이 벌어진 장소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살아났다
북한군 6사단은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모든 북한군 중 최고의 전과를 올린 부대다. 6월 27일, 제일 먼저 한강을 도강했는데 이는 서울이 함락하기 전이었다. 이후 충남과 호남지역을 차례차례 석권하면서 가장 남쪽인 남해안의 목포·순천·여수까지 내려온 뒤 서진했다. 이들이 7월 31일, 경상남도의 서쪽 입구인 진주를 함락시키자 마산에서 위기가 고조됐다. 유엔군 지휘부가 놀랐을 만큼 이들의 기동 속도는 대단했다.
마산은 부산에서 50㎞에 불과해 하루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따라서 이곳 일대까지 적이 진출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 8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때 만일을 대비해 후방인 진해~밀양~울산을 연결하는 데이비슨선이라는 또 하나의 방어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는 항전이 목적이 아니라 유엔군이 부산을 통해 철군하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한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다시 말해 이곳을 사용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바로 그 근처까지 북한군 정예 부대가 등장한 것이었다. 위기를 직감한 워커는 낙동강 방어선으로 8월 2일에 과감히 상주를 포기하고 이곳을 지키던 미 25사단을 급거 움직였다. 덕분에 낙동강 방어선의 북쪽은 8월 11일부로 20㎞를 뒤로 더 물러나 왜관에서 포항 사이의 구간으로 재조정됐다.
그렇게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하루 만에 1개 사단을 130㎞를 이동·전개한 워커의 결정은 낙동강 전투, 나아가 6·25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은 승부수가 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투는 정작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워커는 마산에 닥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방어선을 진주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 25사단에 101대의 전차를 증강해 8월 7일 역공을 시작했다.
이것은 6.25 전쟁에서 미군이 실시한 최초의 공세였다. 하지만 살인적인 무더위에 병사들이 쉽게 지쳤고,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북한군의 반격이 가해지자 상황은 역전됐다. 결국 3개 포병대대가 궤멸당하는 참사를 입고 8월 16일 진주 탈환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2000명 이상의 적군이 사상했는데 이는 예비대가 없다시피 한 북한군 6사단에 치명타로 작용하면서 더 공세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만일 당시에 미 25사단의 긴급 전개가 없거나 마산이 함락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렇다면 여건상 배후가 노출된 낙동강 방어선 일대의 아군은 데이비슨선으로 후퇴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문제는 앞서 언급처럼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가히 모골이 송연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마산을 지켜내면서 대한민국을 살아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