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타이(연태). 한국인에게는 고량주 브랜드로 유명하다. 한국과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중국의 이 도시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모로 한국과 가깝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닿는다. 인천, 평택, 부산 등 한국 항구도시와 연결되는 항로도 무려 6개다. 가까운 만큼 교류도 많다. 약 5만 명의 한국인이 거주 중이며 중국 도시 중 한국 대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해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이 마음껏 비즈니스 할 수 있는 여건도 갖췄다. 한중산업단지 조성 이후 한국 기업은 세금 감면, 보조금 등 각종 우대를 받으며 이곳에서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옌타이로 기업과 사람이 몰려드는 이유가 뭘까? 그 매력을 현지에서 느껴본 6인에게 물어봤다.
채규전 산동유나이티드기계유한공사 대표. 취재원 제공
2000년 1월, 대우종합기계 옌타이공장 법인장으로 부임했다. 이때 옌타이에 처음 오게 된 건가?
대우중공업 옌타이법인이 1996년 6월 준공하기 전부터 옌타이에 오곤 했다. 특히 옌타이 법인장으로 취임하기 2년 전 베이징에서 근무할 당시 옌타이에서 생산된 굴삭기의 영업을 담당하며 옌타이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곳은 90년대만 해도 작은 어촌 도시에 불과했고 지금처럼 기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 사업장이 있는 곳이기에 하루하루 정 붙이고 생활하면서 옌타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사람들로 붐비던 베이징에서 살다가 한적한 곳에 온 것이 좋았다.
회사에서 업무 감독 중인 채규전 대표. 취재원 제공
*채규전 대표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교육과(자동차전공)을 졸업했다. 이후 1976년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미국법인 대표, 해외영업 담당, 중국 굴삭기판매 총괄, 중국 옌타이공장 법인장을 거쳐 2005년 테렉스 중국 법인장, 2007년 산동유나이티드기계 대표, 2009년 중국샤먼공정기계(국영기업) 총재 등을 역임하고 2013년부터 현재까지 산동유나이티드기계에 몸담고 있다. 이밖에 옌타이한인상공회 명예회장, 옌타이한국국제학교 초대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중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중책을 역임했다,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옌타이의 장점은 무엇인가?
옌타이는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우리와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옌타이 푸산(福山)구는 한국인이 즐겨먹는 자장면의 고향이다. 문화와 정서가 비슷한 곳이기 때문에 외국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산둥유나이티드기계를 옌타이에 설립하게 된 이유도 이곳에 깊은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우중공업 옌타이법인은 첫 번째 희망공정에 75만 위안을 기부해 초등학교 세 곳을 설립했다. 가장 오른쪽이 채규전 대표. 취재원 제공.
옌타이에서 생활하며 잊지 못할 경험이 있다면?
2000년 1월 1일부터 옌타이에 거주했으니 올해로 25년째 옌타이에 살고 있다. 물론 중간중간 업무 때문에 베이징, 샤먼에서 살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생활의 근간은 옌타이에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1년 가을, 직원들의 단합을 위해 제1회 대우가족(직원 및 가족)운동회를 열었을 때다. 운동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행사를 통해 직원들의 재능을 발견하게 됐다.
먼저 공회(公會)에서 들고 온 기획안을 보고 크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기획안 내용을 보니 전국체전을 하는 것처럼 종목의 다양함은 물론 심판진도 옌타이시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었다. 나는 직원에게 “이렇게 다양한 종목을 운영하는 데 문제는 없겠냐”고 물었고, 직원은 “걱정 말라”며 자신있어했다. 기획안에 승인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운동회 당일 결과는 어땠을까?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대우 임직원 및 가족 모두가 행복한 운동회가 됐다. 이를 계기로 주재원과 현지 직원들의 유대가 더욱 끈끈해졌음은 물론이고, 성공적인 개최 소식을 들은 옌타이시 정부·은행 등 산하기관과 옌타이에 동반 진출한 우리 협력업체 직원들의 가족도 참여하게 해달라는 의견이 나왔다. 성공적으로 첫 단추를 꿴 덕에 대우가족운동회의 규모는 생각보다 더 커졌다. 이때의 운동회는 회사 이미지 제고는 물론이고 옌타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옌타이에서 '거목(巨木)' 같은 존재라고 들었다, 특히 한인 기업가와 학생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
2000년만 해도 외국인 자녀의 교육환경이 열악했다. 특히 옌타이에는 변변한 외국인 학교가 없어 대부분의 자녀들은 중국 현지(로컬)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교육법상 현지학교는 외국인의 재학이 불가능해 어찌저찌 입학은 해도 졸업증을 발행할 수 없었다. 학령기 자녀를 둔 부모에게 교육 문제는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옌타이 한인회를 중심으로 한국학교를 세워야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먼저 옌타이시 정부의 도움을 받아 산둥성 정부의 허가를 받고, 이어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는 일을 진행하게 됐다. 다행히 옌타이 시정부 관련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학교건설 위한 부지 확보와 건축에 드는 비용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정책은 매칭 펀드(matching fund) 개념으로 옌타이 학교설립을 위해 현지에서 필요한 자금의 50%를 조달하면 정부에서 나머지 50%를 지원하는 제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옌타이 현지 자금 확보를 위한 모금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 와중에 겪었던 어려움들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옌타이에 진출한 기업들의 협조와 옌타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이후 한국 정부와 옌타이 시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부지를 확보해 학교를 건축할 수 있었다. 옌타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녀 교육이라는 숙원사업을 이뤘던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가 옌타이 살면서 이루었던 그 무엇보다 큰 보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옌타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옌타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긴 수식은 필요 없다. 한국인에게 옌타이는 왕래하기도, 사업하기도 좋은 곳이다.
차이나랩 임서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