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핵보유국 인정 압박
노동신문은 이날 김정은이 핵무기연구소와 무기급 핵물질 생산기지를 방문해 핵탄두와 핵물질 생산 실태를 보고받고 생산 확대를 위한 과업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한·미 정보자산이 해당 시설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인 김정은의 방문 일자나 위치, 명칭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북한 핵 개발 총책으로 알려진 홍승무 노동당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이 김정은을 수행했다.
앞서 북한은 10년 미국 핵과학자 스그프리드 헤커 당시 스탠퍼드대학교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을 초청해 영변 핵단지 내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했다.
그러나 핵심 장비인 원심분리기를 포함해 우라늄 농축시설 내부의 모습을 관영 매체를 통해 직접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례적인 행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북·미 하노이 핵 담판이 결렬된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우라늄 농축시설을 김정은이 직접 공개한 건 자신들이 핵보유국이란 점을 과시한 것"이라며 "향후 미국과의 담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실패로 끝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베트남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 당시 영변 핵단지 외에는 핵농축 시설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 시설이 "5곳"이라고 숫자까지 공개하며 협상을 결렬시켰다.
"핵물질 생산 토대 더 강화" 양적 승부수
또 김정은은 여러 차례 공개 발언을 통해 대남 사용 가능성을 열어 둔 전술핵무기의 생산을 재차 강조하면서 직접적인 대남 위험도 서슴지 않았다. 이날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전술핵무기 제작에 필요한 핵물질 생산에서 보다 높은 전망 목표를 내세우고 총력을 집중해 새로운 비약적 성과를 안아오라"고 지시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물질 생산 확대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핵무기 수 우위를 기반으로 하는 '2차 공격' 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지적한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실효적인 핵억제력을가질려면 적의 핵 일차타격에 살아남아 반격할 수 있는 2차 핵 타격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라며 "북한도 이를 위해 핵무기를 100~200기 이상으로 늘려 핵의 생존성을 높이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확장억제 강화에 맞불
자신들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있는 한·미·일의 협력을 의식하면서 김정은의 핵무력 증강 방침은 자위권 차원의 정당한 조치라고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미국이 핵 기반의 군사 블록을 만들어 자신들을 압박한다는 김정은의 정세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며 "북한이 책임있는 핵보유국이라고 강조하면서도 핵무기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겠다는 이중적인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도 한·미를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김정은의 북한군 특수작전무력기지 지난 12일 평양 인근에서 진행된 신형 600㎜ 방사포차 성능 검증 시험 현지지도 소식도 함께 전했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읽은 정부 입장문을 통해 "북한의 불법적인 핵무기 개발은 다수의 유엔안보리 결의의 명백한 위반이자 한반도와 세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북한의 어떠한 핵 위협이나 도발도 굳건한 한미동맹의 일체형 확장억제 체제를 기반으로 한 우리 정부와 군의 압도적이고 강력한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도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미 대선을 앞두고 핵실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핵실험 시기는 북한 지도부의 결심에 따라 달라질수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예단하는 것은 제한된다"며 "미 대선 등 대내외 정세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시기를 저울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의도 등을 면밀히 파악하는 중이며, 북한 전반 동향을 관찰하고 분석 중에 있다"며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미 정보당국이 긴밀히 추적 중"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도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북한 핵, 미사일 개발은 우리나라(일본)와 국제사회 평화,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미국,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협력하면서 (북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이행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