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가 바꾼 차례상
지난 9일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의 한 청과물점. 가게를 지키던 김용국(52)씨가 “애플망고도 애플, 즉 사과니까 조상님도 이해해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좌판 위에는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애플망고가 놓여 있었다. 김씨는 “차례상에 올린다며 빨간 사과를 찾는 손님이 많지만 새빨간 사과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너스레가 통했을까. 차례상에 올릴 빨간 사과를 찾던 주부는 결국 애플망고를 손에 들고 가게를 떠났다.
다음날인 지난 10일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도 추석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하지만 시장을 찾은 시민들은 가격이 크게 뛰어 ‘귀한 몸’이 돼버린 생선엔 지갑을 닫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굴비를 보러 나왔다는 주부 박현숙(55)씨는 “조기 가격이 너무 올라 차례상엔 차라리 옥돔을 올려야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울상이 된 건 상인들도 마찬가지. 수산물 가게 주인 임모(62)씨는 “수온이 올라 물고기가 잡히질 않으니 가격이 오르고, 가격이 오르니 매출도 늘지 않고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지난 5일 기준 굴비 가격은 전년 대비 63.5%, 조기 가격은 41.9%나 급등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추석 차례상도 크게 바뀌고 있다. 새빨간 사과는 갈수록 줄고 있고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쉽게 잡히던 조기와 명태 등은 이미 귀한 생선이 됐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와 ‘어동육서(魚東肉西·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에 맞춰 차례상을 차리려는 소비자들도 대체 품목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땅과 바다 가리지 않고 불어닥친 지구온난화가 차례상에 오를 과일과 생선까지 바꿔놓는 모습이다.
온난화가 가속화하면서 빨간 사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2010년까지만 해도 전 국토의 68.7%에 달했던 빨간 사과 재배 가능 지역이 2030년엔 24.8%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실제로 경상북도 등 빨간 사과로 유명했던 남부 지방에선 아예 노란 사과 등 기후변화에 적합한 신품종 육성으로 눈을 돌린 상황이다.
반면 사과를 재배하기엔 추운 기후로 여겨졌던 강원도의 사과 재배 면적은 지난해 930㏊에서 올해 1600㏊로 급증했다. 농촌진흥청은 기후변화가 현재 속도로 진행될 경우 머지않아 전국에서 강원도만 유일하게 사과 재배에 적합한 기후대로 남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진흥청 관계자는 “지금까지 추세를 보면 예상했던 시나리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며 “우리가 늘 접하던 빨간 사과도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온난화의 영향은 바다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국립수산과학원이 측정한 한반도 인근 바다의 지난해 연평균 수온은 19.8도로 1990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온이 계속 상승하자 조기(굴비)는 이미 수년 전부터 중국산으로 대체됐다. 뜨거워진 한반도 바다를 떠나 멀리 북쪽으로 이동한 명태는 이젠 러시아 정부로부터 어획 쿼터를 할당받아 잡아 오는 실정이다. 이마저도 가격이 만만찮은 탓에 일부 소비자들은 조기를 빼고 차례상을 차리거나, 옥돔 등 과거 제주도와 남부 지방에서 주로 잡히던 어종으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과 대신 애플망고, 포도 대신 샤인머스캣, 조기 대신 옥돔이 올라가는 차례상에 문제는 없을까. 이에 대해 성균관 측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예전에 저장이나 운송이 어려웠던 시절에도 각 지역에서 나는 품목으로 상을 차리는 게 통용됐다는 설명이다.
방동민 전 성균관 의례부장은 “중국의 옛 문헌을 보면 바나나를 올렸다는 표현이 성대한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며 “조상을 생각하며 귀한 음식을 올린다는 마음만 있다면 열대 과일로 상을 차려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