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승리한 쪽은 피해 보상을 위해 포로를 전쟁 복구 등에 동원한다. 원칙적으로 금지된 행위이고 일종의 보복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제재할 방법은 없다. 특히 입은 피해가 클수록 착취 강도가 커진다. 예를 들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뒤 포로가 된 9만의 독일군 병사들은 강제 노역에 투입됐다. 그중 상당수가 학대·질병 등으로 죽었고, 1955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이는 5000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또한 나치에 의해 수백만의 소련군 포로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과 비교하면 약과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포로의 대우와 처리에 관한 내용이 제네바 조약에 추가됐어도 일단 잡히면 생사여탈권이 박탈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경우에 따라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군 포로가 전략 시설 보호를 위한 방패로 삼고자 용산 일본군 사령부·인천항 인근 등에 수용되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적에게 포로는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더불어 아군의 작전을 방해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그래서 포로 구출은 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이들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공세를 펼치기 어렵기도 하지만, 일단 적진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는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독일·소련·일본처럼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세력에게 잡힌 포로들의 경우는 신속히 구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6·25 전쟁 당시 아군이 운용한 거제수용소나 공산군의 벽동수용소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다수의 포로수용소는 후방 깊숙이 위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구출 부대가 접근하기부터 쉽지 않다. 더해서 수용된 포로가 일사불란하게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면 구출이 어렵다. 그런 점에서 1945년 1월 30일, 필리핀 카바나투안 수용소에 감금된 511명의 포로를 구출한 미군 제6레인저 부대의 활약은 경이적인 성공 사례다.
필리핀을 점령한 뒤 일본군은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특히 1942년 ‘바탄 죽음의 행진’으로 알려진 학대로 약 2만명의 미군 포로가 희생되기도 했다. 전세가 역전된 뒤 일본군은 범죄 행위를 은폐하려고 카바나투안 수용소에 감금된 513명의 포로를 학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27명의 미군 레인저 대원이 포로 구출에 나서 513명 중 심장마비로 병사한 한 명과 소재 파악이 늦었던 한 명을 제외한 511명을 구출했다.
그 와중 일본군 523명을 살상했을 만큼 전투도 일방적이었다. 수용소 인근에 한 개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동하기 전 속전속결로 승부를 완벽하게 결정지었다. 레인저 대원의 역할이 가장 컸지만, 외곽에서 지원에 나선 200여 명의 필리핀 원주민 저항 세력의 도움, 거동이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음에도 적극적으로 행동한 포로들의 협조가 어우러져 거둔 쾌거였다.
이처럼 적극적인 대처로 학살극을 막기도 했지만, 이와 반대로 대의를 위해 포로가 되었을지 모를, 혹은 포로가 되지 않았어도 어디엔가 생존해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아군의 구출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사례도 있다. 6·25 전쟁 당시인 1952년 4월 4일, 미 공군의 B-26 폭격기가 실종됐다. 그런데 실종 폭격기를 조종했던 이는 당시 미 8군을 이끌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외아들이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미 5공군 사령관 프랭크 에베레스트가 직접 상황을 브리핑했다. 구조대가 급파되었으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밴 플리트는 “적진 한가운데서의 수색은 너무 위험하다. 즉시 작전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실종 조종사의 구조는 상당히 중요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조종사는 육성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고급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공군의 제6탐색구조비행전대처럼 전담 구조부대도 존재한다. 때문에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 수색을 진행해도 문제 삼기는 어렵다. 하지만 밴 플리트는 아들의 생존 가능성을 낮게 보고 수색을 중단했다. 최고위 지휘관이다 보니 눈물을 머금고 공적 이익을 우선했던 것이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사례도 있지만, 그럼에도 포로의 생환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적진에서 고통을 받는 이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