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주한미군은 대한민국 안보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던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총 9개 사단이 파병돼 최대 7개 사단이 동시에 주둔했던 6ㆍ25 전쟁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2개 사단으로 구성된 미 제1군단이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서부전선의 주요 축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자주국방의 기틀조차 준비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만일 이들 부대가 베트남으로 이동한다면 그야말로 위기가 닥쳐올 것은 명약관화했다.
결국, 정부는 고심 끝에 월남전 참전을 결정했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건국 후 최초로 대규모 해외 파병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이처럼 주한미군의 이동을 막으려던 것, 즉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병 제2여단을 필두로, 수도보병사단, 제9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1개 군단 규모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이는 해외 참전국 중 미국 다음의 규모였다.
단지 외형으로 본다면 베트남에 파병한 병력의 규모가 당시 주한미군과 비슷하므로 단순히 그게 그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총마저도 지원에 의존하던 당시 국군의 전력을 고려하면 주한미군이 보유한 전투력과 인계철선으로써의 역할은 단순히 병력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어쨌든 베트남 파병 덕분에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고 미국의 지원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당시 국군의 8% 정도인 1개 군단이 원정 갔다는 것은 그만큼 전력 약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앞서 언급한 파병 부대들은 휴전선 경계 부대들을 제외한다면 국군이 당장 가동할 수 있었던 핵심 전력이었다. 이에 원정군의 파병이 완료된 직후인 1966년, 연기에 주둔한 향토사단인 제32보병사단을 전투사단으로 개편해 양평으로 전개하고 새로운 향토사단인 제51보병사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1955년에 창설된 8개 향토사단 중 하나였던 제32사단은 충남지역 위수 임무를 담당하다가 1966년 7월 제1 야전군으로 배속이 변경된 뒤 150㎞를 이동해 주둔지를 옮겨 전투사단으로 재편됐다. 하지만 미 제7사단의 철군이 이루어지자 1972년 대한민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으로 다시 개편이 결정되었다. 미군이 철군하며 이전한 장비를 이용해 양적 격차를 해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을 국군 최초의 기계화사단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 완편을 기준으로 보자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편성 시작을 기준으로 따지면 그렇지 않다. 설명했듯이 국군 최초로 기계화사단 편성에 들어간 부대는 제32사단, 즉 백룡부대다. 지금도 보병사단을 기계화사단으로 개편하려면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미국의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선례도 없었고 경제력도 빈약했던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백룡부대는 개편 속도가 빠르지 않았지만, 묵묵히 기계화사단으로 변신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73년 주월한국군이 철군하면서 백룡부대는 향토사단으로 재전환이 결정됐다. 이에 따라 귀국한 맹호부대에게 장비를 내주고 최초 창설지로 복귀했고 대신 제51사단은 경기 남부로 이전했다. 사실 서류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제32사단이 수도사단으로, 제51사단이 제32사단으로 그리고 제99보병여단이 제51사단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현재 국군은 막강한 기계화 부대를 보유 중인데,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후방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백룡부대가 그러한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비록 개편 도중에 주월한국군이 복귀하며 임무와 조직을 다시 변경하게 되었지만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향했던 제32사단의 첫걸음은 국군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만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국군 기계화부대 역사에 상당히 의미 있는 또 다른 한 획이 그어졌다.
제11 기동사단에서 차출된 원정 부대가 카타르에서 카타르군과 연합 훈련을 벌인 것이었다. 그동안 국군의 해외 훈련은 대부분 병력만 갔었지만, 이번에는 국산 상륙함에 K2 전차 4대와 K9 자주포 4문을 주축으로 구성된 총 14대의 장비를 싣고 중동까지 가서 훈련을 펼친 것이다. 소규모 부대고 실전은 아니었지만, 이는 국군 기계화부대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다. 어렵던 시절에 백룡부대가 뿌린 씨앗은 그렇게 국군의 자부심으로 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