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담그기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삶은 콩을 절구에 한가득 넣고 으깨서 메주를 만들 때는 동네 사람들로 마당이 북적거렸고, 그렇게 만든 메주 덩어리들이 발효되면 겨우내 집안은 콤콤한 냄새로 가득했다. 잘 띄운 메주를 소금·물과 섞어 숙성시키면 간장과 된장이 된다. 건조시킨 메줏가루에 고춧가루와 찹쌀을 섞으면 고추장이다. 간장과 된장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고추장은 우리에게만 있는 독특한 장이다. 이렇게 담근 장은 두고두고 온갖 식재료와 어울리며 우리 밥상을 채운다. 심지어 오래 전 담가 남겨둔 씨간장에 올해 담근 햇간장을 더하는 겹장 방식으로 그 맛을 수백 년씩 이어가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 장 문화는 그렇게 수천 년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콩을 삶아 으깬 후 네모난 벽돌모양으로 만든 메주. [연합뉴스]
지난 3일(현지시간) 오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는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장 담그기’라는 공동의 행위가 관련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면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무형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문화다양성 증진에 기여하는 등 인류무형유산 등재 요건을 충족한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한국은 2013년 ‘김장 문화’에 이어 두 번째로 ‘장 담그기 문화’를 인류가 보존해야 할 음식 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한식의 가치를 또 한 번 세계에 알렸다.
유네스코, 상업화 우려해 ‘문화’ 붙여 등재 기순도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제35호)이 사는 종가 마당에는 장을 담은 1200여 개 항아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연합뉴스]
이날 파라과이 현지에 있었던 이규민 한식진흥원 이사장은 중앙SUNDAY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식의 근간은 장”이라면서 “중국과 일본에도 장 문화가 있지만 우리가 먼저 유산으로 등재됐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76세 고령에도 3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양진재 종가의 씨간장을 직접 손에 들고 파라과이 행사장에 참석한 기순도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제35호)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집안의 씨간장을 잘 보전하기 위해 52년간 정성을 다했다”며 “우리 장 담그기 문화가 이제 세계인이 함께 지켜야 할 유산이 됐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국민적 관심이 모이고, 또 후대가 이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전통장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기 명인의 간장은 2017년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가 선보인 한우갈비에 사용되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370년 된 씨간장을 썼는데 외신은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특별한 간장”이라고 소개했다.
간장·된장·고추장, 이른바 ‘장 삼총사(장 트리오)’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양념이다. 전 세계인에게 ‘건강한 음식’으로 알려진 한식의 핵심은 채식과 발효 음식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요소가 바로 깊고 다양한 맛을 내는 장이다. 이번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장 담그기 문화’는 바로 이 장을 만들고, 관리하고, 이용하는 과정에 따르는 지식·신념·기술을 비롯해 가족·마을 구성원이 함께 참여해 맛을 공유하고 유대감을 갖는 우리만의 공동체 문화까지 모두 아우른다.
(왼쪽부터)지난 10월 ‘한국의집’ 한식연구팀장인 김도섭 셰프와 조리고문인 조희숙 셰프 주도로 해외 미디어·셰프들을 대상으로 장 만들기 문화 워크숍이 진행됐다. [사진 한식진흥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중 음식유산 등재는 굉장히 까다롭고 조심스럽다. 바게트가 아니고 ‘바게트 문화’, 차가 아니고 ‘차 문화’, 김치가 아니고 ‘김장 문화’로 등재하는 이유도 특정 음식 자체를 등재했을 경우 이후 벌어질 심각한 상업화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상업화 때문에 세계인과의 공유가 가능하다. 관세청에 따르면 K푸드 확산과 더불어 고추장·된장 등 전통 장류를 비롯해 불닭·떡볶이·불고기·양념치킨 등을 만들 수 있는 혼합양념 소스까지, 지난해 소스류 수출액은 역대 최대인 3억8400만 달러(약 5000억원)를 기록했다. 수출 국가도 139개국으로 늘었다.
넷플릭스 콘텐트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에드워드 리 셰프는 ‘고추장 버터 스테이크’와 독창적인 ‘비빔밥’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넷플릭스]
78년 발효 기술력의 샘표 고추장 매출 역시 연평균 25% 이상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샘표 ‘우리맛연구중심’의 최정윤 헤드셰프는 “2010년부터 스페인 알리시아 연구소와 함께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장 연구를 시작했고, 스페인·뉴욕·상하이에 컬리너리 스튜디오를 두고 우리 장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현지 음식과 연결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면서 “산업적으로 한식 시장이 커지려면 소스 시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의 장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려면 현지 소스들과 섞이면서 다양한 맛과 연결돼야 한다”면서 “알아야 좋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장 트리오에 대한 외국 셰프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화제의 넷플릭스 콘텐트 ‘흑백요리사’에서 눈길을 끈 메뉴 중 하나는 에드워드 리 셰프가 만든 ‘고추장 버터 스테이크’였는데 해외 셰프들에게는 이미 소문난 방법이다. 2014년 레스토랑 오픈 때부터 장 트리오를 활용한 디저트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서양 메뉴와 장의 접목을 연구해온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는 “외국인 셰프들은 우선 콩·소금·물, 즉 단순한 비건 재료들로 만든 양념이 한식의 중독적인 감칠맛을 낸다는 점을 신기해한다”면서 “특히 고추장은 매운맛에 단맛도 있고, 페이스트(죽 같은 질감) 형태라 다른 나라 소스들과 섞어 사용하기에 편리해 많이들 좋아한다”고 했다.
“세계 음식과 섞이면 한식 관심 더 커질 것” 지난 11월 LA에서 열린 현대자동차 행사에선 된장·고추장 파우더, 된장 거품 등을 이용한 한식 메뉴가 소개돼 호평받았다. [사진 난로학원]
한식 고유의 채식문화와 발효문화에 빠진 외국의 유명 셰프들은 직접 한국을 방문해 전통 장 만들기를 체험한 후 자국의 다양한 소스 또는 크림·치즈·버터 등 다양한 식재료와 섞어 맛의 완성도를 높이는 재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의 장은 고기·채소·생선 요리 등 어떤 식재료와도 잘 어울리며 확장성 역시 크다.
한식 산업화·연구·미래인재양성을 위한 비영리 사단법인 난로학원과 2024년 LA타임스에서 ‘올해의 레스토랑’으로 선정한 모던 한식 레스토랑 ‘Baroo(바루)’의 어광 셰프는 최근 미국 LA 베벌리 힐스에서 열린 ‘아이오닉(IONIQ) 9 월드 프리미어’의 F&B를 총괄 기획 및 운영했다. 이날 선보인 음식들은 발우공양의 의미를 담은 채식 위주의 메뉴로 된장·고추파우더, 된장 거품, 쌈장소스 등을 활용했는데 현지 주요 글로벌 미디어와 VIP 300명으로부터 호평 받았다.
강민구 셰프가 한국의 장을 활용해 개발한 ‘밍글링 팟’. [사진 밍글스]
사실 우리의 장이 한식이 아닌,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식재료·소스들과 섞이는 것을 두고 한식과 장의 본질이 망가질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강민구 셰프는 “우리의 장이 세계 여러 나라 식재료들과 섞이고 변주되는 만큼 한국의 식재료 수출이 늘고,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또한 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요리에도 경계 없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 셰프는 올해 3월 우리 장을 소재로 한 영문판 책 『장: 더 소울 오브 코리언 쿠킹(JANG: The Soul of Korean Cooking』을 출간했다. 한국 전통 장이 가진 가치와 장을 활용한 다양한 음식 레시피를 소개했는데 7대 3의 비율로 한식과 서양음식이 섞여 있다. 모두 집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종류들이다. 강 셰프는 “우리 장의 특성과 본질을 알아야 제대로 된 다양한 활용도 가능하다”면서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으로 먹어봤다 하더라도 그 맛에 일단 빠지게 되면 프리미엄 제품과 고급 한식문화에 대한 욕망 또한 커지기 때문에 영미권 미식가들에게 한국의 장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우리 장 문화에 대한 시급한 고민 중 하나는 한국의 젊은 세대를 사로잡는 데 있다. 도시화·산업화로 집에서 장을 담가 먹는 문화는 사실상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무엇보다 주식인 밥을 잘 먹지 않는 젊은 세대에서 반찬 문화와 더불어 장맛의 경험 자체가 급격히 줄고 있다.
10년 전 '밍글스' 오픈 때 강민구 셰프가 개발한 디저트 '장 트리오'. 강 셰프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간장&된장&고추장 3가지를 다 활용해 이름도 '장 트리오'라 짓고 상표등록까지 했다"고 소개했다. 디저트 '장 트리오'는 지금도 '밍글스'를 대표하는 메뉴로 유명하다. [사진 밍글스]
이규민 한식진흥원 이사장은 “한식 글로벌화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우리 먹거리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우리의 고유한 장 문화를 계승 보존하고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잘 전달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했다. 또 “대기업이 명인들과 협업해서 전통 장 기법을 잘 활용한 프리미엄 제품들을 많이 만들어 산업적 지속가능성을 이끌기를 기대한다”면서 “전통 장에 지갑을 열 수 있도록 소비자 인식을 바꾸는 노력도 함께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반가음식과 전래음식의 대가 강인희 선생의 제자인 ‘한국전래음식연구회’ 이말순 요리연구가의 이야기는 의미 깊다. “7~8년 전 서울의 초등학교 3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장 담그기를 했다. 시골에서 직접 만든 메주를 구해서 물과 소금으로 장을 담그고 40일 후 된장과 간장을 떠서 아이들이 모르게 시판간장·된장을 뒤섞어 맛보게 했더니 하나같이 우리가 직접 담근 전통 간장·된장이 맛있다고 하더라. 맛은 이렇게 정직하고, 우리의 DNA는 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기초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바다 식재료가 풍부한 나라가 없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다채로운 식재료와 전통 장으로 만든 음식을 먹을 기회를 줘야한다. 약식동원(藥食同源),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같다고 했다. 우리 전통 식생활에 대한 기초교육이 필요할 때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