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전부터 경제 분야에서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고율의 관세 부과 방침을 발표한 트럼프가 외교 분야에서도 미국의 직접적 이해에 반하는 사안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겠다는 원칙을 시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젤렌스키 회담 앞두고…“세상이 미쳐가”
프랑스 정부의 공식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한 트럼프 당선인은 이날 파리 엘리제궁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함께 만났다. 유럽의 최대 이슈인 우크라이나 전쟁 논의를 원한 마크롱 대통령의 제안으로 3자 회동이 성사됐다.
트럼프는 3자 회동에 응했지만, 회동에 앞서 “지금 세상이 약간 미쳐가는 것 같다”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미국의 지원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염두에 둔 말로 해석된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밝히며 전쟁의 조기 종식을 공약해왔다. 다만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이 있어 종전을 위해 우크라이나에 영토 포기 등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젤렌스키는 대선 이전인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때도 트럼프를 만나고 당선 직후 별도 통화를 하며 트럼프의 지원을 요청해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모두를 위한 공정한 합의를 원한다”며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을 향해 “우크라이나에 돈을 써야 한다”며 압박하고 있다.
이날 회동은 30분만에 종료됐고, 트럼프는 회동 이후에도 별도 공개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젤레스키 “좋은 3자 회담”…‘트럼프식 외교’ 본격화
반면 젤렌스키는 회동 직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생산적이고 좋은 3자 회동을 가졌고, 트럼프는 언제나처럼 단호했다”며 “우리 모두 전쟁이 가능한 한 빨리, 정당한 방식으로 종식되길 원한다”고 적었다.
마크롱 대통령도 “3국이 역사적인 날에 함께 모였다”며 “평화와 안보를 위한 공동의 노력을 계속하자”고 밝혔다. 과거 트럼프의 외교 정책을 비판해왔던 것과 달리 이번엔 “트럼프의 방문은 프랑스 국민에 큰 영광”이라며 트럼프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트럼프는 “마크롱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면서도 엘리제궁에서 만난 마크롱의 손을 끌어당겨 세게 흔들며 과거 자신을 비판해왔던 마크롱에 대한 불편함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두 사람은 2017년 첫 만남에서 이를 악물고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세게 악수를 나누는 '기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이미 외교적인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캐나다에 25%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한 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플로리다 마러라고 자택으로 찾아왔고,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도 플로리다로 찾아와 우크라이나 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트럼프는 이날 SNS에 시리아 내전과 관련 “시리아가 엉망이지만 우방이 아니니, 미국은 시리아와 관련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와 이란은 정부군을, 미국은 정부군과 친(親)이란 무장세력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온 쿠르드족 민병대를 각각 지원하는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만,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만난 뒤인 8일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했다. 그는 이날 트루스소셜을 통해 "즉각적인 휴전이 이뤄지고 협상이 시작돼야 한다"며 "너무 많은 목숨을 불필요하게 잃고, 너무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있으며, 이대로 계속된다면 훨씬 더 큰, 훨씬 더 나쁜 상황으로 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나는 블라디미르를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그가 행동할 때다"라며 푸틴의 결단을 촉구했다.
또 중국을 향해선 "중국이 도울 수 있다.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며 러시아를 설득해 달라고 요구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절대 시작되어선 안 됐을, 영원히 지속할 수도 있는 전쟁"이라며 "약 60만 명의 러시아 군인이 다치거나 사망했다"고 했다. 또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는 협상을 통해 이 광기를 멈추고 싶어 한다"며 "그들은 터무니없이 40만 명의 군인과 더 많은 민간인을 잃었다"고 적었다.
이와 관련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우크라이나 측이 협상을 거부한 것이며 푸틴 대통령은 협상에 항상 열려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또 트럼프가 언급한 러시아군 손실 규모와 관련해선 "실제론 우크라이나의 손실이 러시아보다 몇 배나 더 많다"고 반박했다.
각국 정상 ‘눈도장’ 경쟁…밀려난 바이든 여사
한편, 트럼프 1기 때 이미 일방적 미국 우선주의 외교 노선을 경험한 각국 정상들은 당선인 신분으로 파리를 방문한 트럼프와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눈도장 경쟁’이 펼치는 분위기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미리 착석해 있던 각국의 정상들은 트럼프가 기념식장에 들어서자 일제히 일어나 트럼프와 경쟁적으로 악수를 청했다. 트럼프는 이 가운데 이날 기념식이 끝난 뒤 영국 대사관저에서 영국의 윌리엄 왕세자를 먼저 만났다. 현지 매체들은 트럼프의 파리 방문 기간 중 각국 정상들이 트럼프와의 만남을 추진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