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가 여권을 권력의 진공 상태로 몰아넣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지 이틀 만인 16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도 직을 내려놨다.
한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탄핵 찬성’에 대해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참 고통스럽다”는 그의 말처럼 ‘탄핵 반대’ 당론을 거스르는 과정은 험난했다. 탄핵안 가결 후 국민의힘 내 다수인 친윤·비한계 의원은 그 책임을 한 대표에게 맹렬히 물었다. 탄핵 직후 열린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고성과 삿대질이 난무하고, 선출직 최고위원이 줄사퇴하면서 “더는 당을 이끌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윤 대통령은 부인하고 있지만, 계엄 때 체포 대상자 명단에 한 대표가 있었다는 진술이 이어진 것만 봐도 그렇다. 한 대표는 12·3 사태 직후인 4일과 6일 윤 대통령을 직접 대면했지만 정국을 풀어낼 만한 진전은 없었다. 여권 관계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믿고 무슨 타협을 하고 약속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윤 대통령이 한 대표를 “우리 동훈이”라고 부르며 문재인 정부 말기 때는 ‘독립운동을 한 동지’에 빗댈 정도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1년 전, 한 대표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한 직후부터 흔들렸다. 수직적 상하 관계에 익숙한 윤 대통령은 한 대표가 여당 비대위원장에 취임한 뒤에도 ‘직속 부하’로 여겼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한 대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한 대표는 총선을 앞두고 주변에 “윤 대통령과 나는 이미 사사로운 관계를 떠나 역사 속 관계가 됐다”며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각자 해야 할 일, 역할을 하면 된다”고 말하곤 했다. 윤 대통령 입장에선 집권 후반기 국정 운영 동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선거였겠지만, 한 대표는 총선을 “내 선거”라는 관점에서 치렀다. 이런 그림을 예견했던 한 여권 인사는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동훈 비대위원장’부터 막아야 했는데, 그게 참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이미 이렇게 생각의 간극이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개개 현안에 관해 충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건희 특검법을 비롯한 김건희 여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총선 공천 때 각자의 지분을 얼마만큼 인정할지 등은 당연히 뒤따르는 갈등 요소였다.
이런저런 갈등이 중첩되면서 두 사람은 비대위원장직을 놓고도 맞붙다시피 했다. 김 여사 명품백 수수 문제로 충돌하던 지난 1월 21엔 윤 대통령이 이관섭 당시 비서실장에게 지시해 한 대표의 사퇴를 종용했다. 지난 4월 1일 윤 대통령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할 때는 한 대표도 “담화문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지 않으면 비대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복수의 여권 관계자가 전했다.
그러다 지난 7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김 여사 문자 ‘읽씹(읽고 무시)’ 논란까지 겪으며 한 대표가 당권을 쥐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 회복 불가 상태였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응당 해야 할 독대 여부조차 논란이 될 정도로 신뢰를 상실했다.
두 사람이 쌓인 감정을 사석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한 대표가 윤 대통령을 “그 사람”이라고 칭했다는 얘기나 윤 대통령이 한 대표를 “살모사 같다”고 했다는 얘기가 정치권에 퍼져나갔다. 두 사람 사이를 잘 아는 인사는 “비대위 때부터 이미 두 사람의 신뢰가 깨졌고, 그 뒤로 단 한 번도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말처럼 “20년 넘도록 교분을 맺어온” 두 사람은 결국 권력 앞에 갈라져 서로 큰 상처를 입혔다. 여권에선 두 사람이 2012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처럼 정치적 타협을 해내길 바랐다. 하지만 극한 갈등으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1997년 대선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보다 못한 관계로 귀결됐다는 게 여권의 평가다. 결과적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보수 진영에서 가장 불운한 1ㆍ2인자 관계로 남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