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계엄 정당성을 강변하는 담화를 낸 지난 12일, 박단 대전협 비대위원장을 만났다. 궤변 가득한 이번 담화는 과거 의료개혁 관련 윤 대통령이 내놓은 담화와 맥락이 비슷했다. 김경록 기자
전공의 의견 수렴 없는 독단적 여야의정협의체 불참, 책임 안 지고 뒤에서 권한만 행사하는 수렴청정….
의정 갈등의 선봉에 선 사직 전공의를 대표하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대위원장을 향해 쏟아진 비판이다. 각을 세운 윤석열 정부뿐 아니라 숱한 언론, 심지어 의료계 내부에서도 적잖은 이들이 정부 주도 협의체 참여를 거부하고 SNS를 통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내놓는 그의 소통 부족을 지적한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의협) 임현택 전임 회장 탄핵과 박형욱 비대위원장 선출이 그의 뜻대로 이뤄지는 과정에서 드러났듯 그의 영향력은 지난 10개월의 의료대란을 겪으며 더 공고해졌다. 특히 '전공의 처단' 문구를 담은 윤 대통령의 계엄 포고문 발표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해온 의정 간 모든 대화가 중단되면서 이대로 가면 내년에도 의료 공백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의료공백을 넘어 의료붕괴를 앞둔 지금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지난 12일 박 위원장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정부, 진정성 없이 언론플레이
의료 공백 뻔한데 갈등 유발만
소송·일자리 문제 해결 없이는
젊은 의사, 필수의료 안 간다
」 지난해 9월 대전협 회장 취임 후 복지부-의협 간 의료현안협의체(이하 협의체)나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의사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만나 요구를 분명히 전달했다. 정부 주장의 오류를 반박하고, 강행 시 미칠 파장도 구체적 근거를 들어 얘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신중한 정책 집행이나 설득을 위한 부가 설명이 아니라 업무개시명령에 이은 면허 박탈과 사법 처리와 같은 겁박이었다. 구속당할 아무 사유는 없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정부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겠다 싶었다. 각오했다. 2월에 일찌감치 계엄의 공포를 겪은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나 역시 국민의 한사람으로 의료 질은 떨어지고 비용은 비싸져 국민 모두 손해 본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그걸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바꿀 생각이 없다고 느꼈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위든 국민의힘 주도 여야의정협의체든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로 삼지 않고 그저 대화했다는 알리바이 만들기로 접근했다. 정부가 진정성이 없으니 회의체 참여가 무의미하다고 봤다.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떠난 직후인 지난 2월 23일 정부는 윤희근 당시 경찰청장(오른쪽)과 박성재 법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의사 집단행동 중대본 회의를 열어 전공의를 겁박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조규홍 복지부 장관, 2월 초 박민수 차관을 각각 만났을 때 심각한 의료현장 왜곡을 불러온 구조적 문제 해결 없이는 실질적 의료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논리적 설명 없이 "정부는 어쨌든 밀어붙일 것"이라고만 했다. 자아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가 발표된 2월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4월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2시간 넘게 뭐가 문제인지 설명했더니 살짝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끝내 "정책은 수정할 수 없고, 2000명 증원도 정부가 잘 준비하면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6월에 만난 장상윤 사회수석, 이주호 교육부총리도 마찬가지였다. "9월을 넘기면 전공의·의대생 없는 의료대란이 내년에도 이어질 텐데 대책 있느냐"고 물었더니 구체적 답변 대신 "그렇게 될 리 없다, 우리가 플랜 B·C 없이 일할 것 같으냐"고 화를 내더라. 그게 계엄령이었다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지 않나. 윤 대통령 만나기 사흘 전 독대했던 이관섭 당시 비서실장 말고는 누구도 현장 이야기를 경청하거나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이 실장은 여당의 총선 패배 후 사퇴했고, 다른 관계자들은 전부 현직이다. -국민 눈엔 정부 노력을 전공의가 외면한 거로 보인다.
정부는 책임을 전공의들에게 떠넘기려고만 했다. 전공의를 계속 때리는 한덕수 총리 등 관료들이 합세해 의사 악마화와 함께 전공의들이 아무 요구 없이 대화를 거부한다는 식의 언론플레이만 했다. 정부는 2~8월에만 의료개혁을 빙자한 의사 비판 광고로 120억원을 집행했다. 돈 펑펑 쓰며 알맹이 없이 일하는 시늉만 하면서 브리핑을 매일 열어 언론을 도배했다. 우린 돈·매체 등 아무 수단 없이 당하기만 했다. 잘못된 사실이나 단편적 숫자, 연봉 몇억 운운 하는 자극적 숫자 몇 개로 국민을 오도하는 정부를 보면서 정말 답답했다.
의사 집단행동 관련 중대본 브리핑에 나선 박민수 복지부 차관. 복지부는 지난 2월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거의 매일 브리핑을 하면서 여론몰이에 나섰다. 6개월 동안 쓴 홍보비만 120억원에 달한다. 연합뉴스
쉬우니까. 대통령의 2000명 출처는 모르겠다. 최소한 정부는 의료개혁의 우선순위가 의대 증원이 아니고,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로는 의료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걸 분명 알았다. 다만 윤석열 정부 누구도 고통이 따르는 구조 개혁을 총대 메고 할 용기가 없어 의사 때리기로 여론몰이를 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척'만 했다. 사기다.
핵심은 돈이다. 정말 의료개혁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훨씬 더 많은 재정을 쏟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의료 소비자인 국민에게 건보료 인상 등 돈을 더 써야 한다고 설득했어야 한다. 그런데 패키지를 보면, 필수의료 수가 인상에 5년간 10조원(1년에 2조원) 투입이 사실상 전부였다. 대한민국 의료비가 연 200조원인데 고작 1%로 필수의료를 어떻게 살리나. 수가 왜곡엔 손을 안 댄 채 정부가 비상진료대책 명목으로 의료대란 이후 8월까지 쓴 돈만 해도 2조원이다. 건보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솔직히 얘기하는 대신 돈은 더 안 쓰면서 더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포장했다. 국가가 돈을 쓰지 않고 의사를 쥐어짜는 '저비용 고효율 정책'이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오면서 필수의료 붕괴와 비급여 팽창과 같은 의료현장 왜곡이 심각해진 것인데 그걸 가속하는 정책으로 어떻게 개혁이 가능한가.
윤석열 대통령은 전공의 사직 직후 직접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한덕수 총리(왼쪽)도 마찬가지다. 연합뉴스
필수의료 위기는 젊은 의사들이 응급의학과·흉부외과·소아과를 안 가서 벌어진 문제다. 진짜 해결을 원한다면 젊은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선택할 수 없는 장애물을 없애주는 게 먼저인데, 립서비스하듯 나열은 했지만 정작 실현 가능한 아무런 구체적 내용이 없었다.
가장 큰 게 소송 리스크다. 한 대학병원 응급실 환자에게 5억7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지난해 12월 있었다. 신장병 앓던 환자는 응급실 찾기 이틀 전부터 호흡 곤란 증세가 있었고, 내원 당일 체온이 40도였다. 응급실엔 걸어왔으나, 점차 의식을 잃어가 의료진이 삽관을 했고 뇌 손상이 왔다. 재판부는 불필요한 삽관에다 주의관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배상 판결을 했다. 당시 윗 연차 응급의학과 선배들이랑 저년차 교수들에게 물었다. "최선을 다한 교과서적 진료였고, 응급의학과 의사 누구라도 똑같이 했을 거 같은데 이것마저 배상하라고 하면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 " 아무도 답을 못했다. 혼란스러웠지만 당장 눈앞의 환자 보느라 생각할 겨를 없이 그냥 응급실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 발표를 계기로 '내 선택이 맞나'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다. 수가 정상화나 사법 리스크 완화 등 구체적 해결 방안 없이 인턴 1년을 2년으로 하는 등 의사를 더 쥐어짜는 방향이라 더는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일자리 문제다. 가령 상급종합병원들은 장비는 비싼데 수가는 터무니없이 낮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흉부외과 전문의를 충분히 뽑지 않는다. 힘들게 전공의 생활을 견디고 전문의를 따도 일자리가 없다. 심장 수술 하고 싶어 흉부외과 갔는데, 전문의 따고 로컬(개원의 시장)에서 하지정맥류 수술을 해야 한다면 누가 선뜻 흉부외과를 지원하겠나. 병원이 전문의를 충분히 뽑을 수 없는 구조가 필수의료 의사 부족의 한 요인이다. 이국종 교수만 봐도 그렇다. 대중적 인지도 있는 인물이 중증 외상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목소리를 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결국 국군대전병원장으로 옮겼다.
※9일 마감한 내년 전공의 모집에서 심장혈관흉부외과 지원율은 3%(65명 중 2명)였다. 그렇다. 전공의는 기성 의사집단보다 순수하다. 어려워도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필수의료를 선택한다. 그런데 힘들게 전문의 따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 어렵다는 암담한 현실을 정부가 강하게 주입해준 꼴이 됐다. 소아과·산부인과 전문의를 따고도 미용 등 다른 과 일반의로 빠진 사람들을 돈만 좇는다고 손가락질하는데, 그들도 만약 소아과·산부인과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분명 그 과를 했을 거다.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현실과 타협했다고 본다. 과거엔 전문의 딴 후 이런 고민을 했지만 정부의 일방적 정책 덕에 몇 년 앞당겨 하게 됐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전공의들이 엄청나게 각성한 상태다.
지난 8월 서울청 광역수사단에 출석한 박단 위원장. 참고인 자격이었지만 경찰은 10시간 넘게 이어진 조사에서 피의자 대하듯 했다. 다른 전공의 대표도 전부 포토라인에 세웠다. 연합뉴스
지난 2월 대전협이 정부에 요구한 7가지 요구(^필수의료 패키지와 2000명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 ^과학적 의사 수급 추계 기구 설치 ^수련 병원 전문의 인력 채용 확대 ^불가항력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완화할 구체적 대책 제시 ^주 80시간 열악한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전공의 겁박하는 부당한 명령 전면 철회와 전공의들에게 정식으로 사과 ^의료법 59조 업무개시명령 전면 폐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나는 안 돌아간다. 복귀를 설득할 명분도 없다.
-윤 대통령의 2000명 고집만큼 비타협적 아닌가.
응급의학과 등 필수의료 의사는 다른 진료과목 의사보다 돈을 잘 버는 것도, 근무 환경이 좋은 것도, 자리가 많아 정년 넘겨 오래 진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송 리스크만 크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걸 선택하는 게 비합리적이다. 그럼에도 사람을 살린다는 보람, 남들이 안 하는 걸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다. 그런데 보람과 사명감만으론 닥쳐올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분명하게 자각한 만큼 그런 환경이 바뀌기 전엔 돌아가기 어렵다. 내년에 7500명 아니라 1만명을 뽑아 부실을 감수하고 교육한다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6년 뒤 필수의료를 선택할 전공의는 거의 없을 거다.
-2025학년도 입시 중지 요구는 비현실적 아닌가.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 가장 현실적이다. 내년 정원을 되돌리지 못하면 2026학년도엔 정부가 먼저 정원 줄이자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의료계가 나설 필요도 없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