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옷깃 스친 인연이라도 찾아라.’ 요즘 한국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재계가 다급해졌다. 트럼프 재집권시 통상 환경이 급변할 가능성이 큰 가운데, 탄핵 정국으로 ‘외교 공백’이 발생하면서 기업들이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수출 국가인 한국에 미국의 정권 교체기는 향후 4년간 수출을 위해 밑거름을 뿌려둬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하지만 지난 16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 후 첫 기자회견을 열면서 한국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코리아 패싱’ 우려는 현실이 되는 모양새다.
수출 비중이 크거나 미국에 대규모 직접투자를 한 기업들은 걱정이 더 크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통상 정책에 따라 수익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어서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평소 개인적 친분에 의존한 행보를 보여 '연줄 찾기'가 중요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하다못해 취임 축하 인사를 하려고 해도 연줄이 있어야 하지 않나”며 “경영진은 물론 임원까지 트럼프를 비롯해 가족, 지인, 공화당 의원, 학교 등 모든 인연을 되짚고 있다”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트럼프 당선인의 자택인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에 지난 16일(현지시간)부터 체류 중이어서 트럼프 당선인과 대면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의 초대로 리조트에 방문한 정 회장은 다음 달 20일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주니어는 올해에만 세 번 방한했는데 이때마다 정 회장을 만날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트럼프 일가와 직접적인 연은 없지만, 국내 기업인 중 유일하게 트럼프 1기 대통령 취임식 때 초청 받았다. 2006년 설립된 한미교류협회 초대 의장을 맡은 김 회장은 트럼프 측근으로 알려진 에드윈 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연구센터 회장과 40여년 전부터 알고 지내왔다. 다만 2017년 취임식 때는 김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풍산 회장)도 트럼프 측근으로 꼽히는 정관계 인사들과 꾸준히 소통해 온 ‘미국통’으로 꼽힌다.
1기 행정부 당시 한국 제조 대기업들의 현지 투자를 노골적으로 요구한 트럼프 대통령은 투자에 대한 보답 성격으로 한국 기업들과 여러차례 만난 바 있다. 2017년 11월 트럼프 방한 당시 청와대 국빈 만찬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등이 참석했다. 2019년 6월 두 번째 방한 때도 트럼프는 이재용 회장, 최태원 회장 등을 만나 미국 투자에 대해 감사를 전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신동빈 회장을 백악관 집무실에 초청했는데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롯데케미칼이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31억 달러(약 4조4500억원)를 투자해 석유화학공장을 설립한 것에 감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회장은 트럼프 1기 취임 직전인 2016년 12월 기업인들과 간담회에 해외 기업인으로는 유일하게 초청 받았지만, 당시 수사를 받고 있어 출국하지 못했다. 대신 트럼프의 측근으로 꼽히는 빌 헤거티 상원의원과 친분이 깊다. 트럼프가 졸업한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출신들도 주목받고 있다. 구본걸 LF패션 회장, 이우현 OCI 회장 등이 와튼스쿨 출신이다.
공식적인 관계보다 개인적 친분을 중시하는 트럼프 스타일을 감안해 재계에선 각종 인연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민간 외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한다. 최태원 회장은 17일 우원식 국회의장과 간담회에서 “기업들이 우려하는 것은 미국 새 정부 출범에 따른 정책변화 가능성인데 기업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는 데 한계도 있고 벅찬 것도 사실”이라며 “정부의 외교력이 절실한 시점인데 여건상 외교력을 온전히 발휘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대외적으로 문제 해결 창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 경제에 기여도가 높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미 투자 규모는 215억 달러(약 30조9170억원)로 세계 1위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 대규모 장기 투자가 필요한 제조업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뤄져 한국 기업들의 투자는 미국 내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미국의 비영리 단체인 리쇼어링 이니셔티브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해외 기업 직접투자(FDI)로 미국에 새로 창출된 일자리가 총 18만2880개로, 이중 한국 기업들의 기여도(17%)가 가장 높았다. 김봉만 한국경제인협회 국제본부장은 “트럼프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국 기업이 투자를 통해 미국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게 시급하다”라며 “트럼프 당선인과 전화 통화가 가능한 측근과 오피니언 리더인 싱크탱크 등을 중심으로 재계가 최대한 많은 만남을 성사시키려고 뛰는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