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자성어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알 지, 다닐 행, 합할 합, 한 일)이다. 앞 두 글자 '지행'은 '앎과 행동'이다. '합일'은 '하나가 되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대략 '앎과 실천이 하나가 돼야 한다'라는 의미가 만들어진다. 신유학(Neo-Confucianism) 사상가 왕양명이 실천의 중요성을 따로 강조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가르친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였다.

지행합일(知行合一). 바이두
왕양명은 저장(浙江)성의 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수인(守仁)이지만, 그가 머물던 산자락 촌락 이름을 따른 호(號) '양명'으로 주로 호칭됐다.
왕양명이 태어날 무렵, 조모가 태몽을 꿨다. 오색찬란한 구름을 탄 신선이 아이를 건네는 꿈이었다. 조부는 이름을 운(雲)으로 지었다. 분명 언어 장애인은 아니었으나, 5세가 될 때까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이름에 태몽을 누설했기 때문'이라는 한 스님의 조언을 참고해 조부는 수인으로 그의 이름을 바꾼다. 개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부가 즐기던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지 않고 암송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왕양명(王陽明). 바이두
왕양명은 17세에 부친 친구의 딸과 혼인을 했다. 혼인 당일에 처가 인근에 거주하는 한 도교 도사(道士)와 대화 삼매경에 빠져 다음 날 새벽에야 귀가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큰 키에 엉뚱한 기질이 다분하던 그가 청년이 되자 학업에 정진하더니 28세에 진사가 됐다.
암군 주후조(朱厚照)의 통치기가 시작된 이후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환관 유근(劉瑾)과 정면으로 대립하여 대중 앞에서 곤장 40대를 맞은 일도 있었다. 시련이 계속됐지만 군사 분야에서도 능력을 발휘해 토비(土匪)들을 토벌하기도 하고, 왕족의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기도 했다.

주후조(朱厚照). 바이두
주된 관심사였던 유교 철학 분야에선 더 큰 성취를 이뤘다. 귀양살이나 다름없던 귀저우(貴州)성의 롱창역(龍場驛) 역승(驛丞)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훗날 양명학 또는 심학(心學)으로 명명되는 신유학 철학 체계의 틀을 마련한다.
그에겐 깨우친 것들을 뒤로 미루지 않고 다른 지식인들과 논쟁하며 바로 검증하는 습관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처럼 그도 제자들과 소탈하게 대화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하루는 남대길(南大吉)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탕한 성격의 지방 관료가 그에게 질문한다. "제가 업무를 처리할 때 잘못이 많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선 그것에 대해 왜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십니까?" 왕양명이 되물었다. "대체 어떤 잘못을 말하는 것인가?" 대길의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그것을 이미 말했다." 대길이 놀라 묻는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가 반문했다. "그럼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잘못인지 알았는가?" 대길이 짧게 대답했다. "양지(良知)로써 압니다." 왕양명은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한다. "그 '양지'가 바로 내가 늘 강학했던 것 아닌가?" 대길이 인사하고 길을 떠났다.

전습록(傳習錄). 바이두
지행합일. 쉬운 네 글자가 아니다. 현실에서 '언행일치'로 칭송받는 삶을 지속하기도 수월하지 않다. 왕양명이 강조한 지행합일의 삶은 과연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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