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함께 해 영광"…36세 트럼프, 69세 닉슨과 11년 '펜팔'

"당신은 이 나라의 위대한 인물, 어젯밤 저녁을 함께 보내 영광이었다."
 
지난 1982년 6월 당시 36세의 부동산 개발자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69세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에게 보낸 첫 편지다. 젊은 사업가와 불명예 퇴진한 원로 정치가. 언뜻 봐선 접점이 없는 '의외의 조합'이었던 그들은 33세 차이를 넘어 펜팔로 지냈다.

펜팔 관계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대선 경쟁 후보를 불법 도·감청한 사건)으로 물러나고 8년 뒤인 1982년부터 시작됐다. AP통신에 따르면 트럼프와 닉슨은 11년간(1982~1993)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1989년 3월 11일 도널드 트럼프(왼쪽)가 텍사스 휴스턴의 웨스틴 갤러리아 볼룸에서 열린 넬리 코널리 추모 갈라에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다. 제37대 대통령을 지낸 닉슨은 트럼프가 45대와 47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AP=연합뉴스

1989년 3월 11일 도널드 트럼프(왼쪽)가 텍사스 휴스턴의 웨스틴 갤러리아 볼룸에서 열린 넬리 코널리 추모 갈라에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다. 제37대 대통령을 지낸 닉슨은 트럼프가 45대와 47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AP=연합뉴스

 
1982년 첫 편지에서 트럼프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닉슨에게 "그때 만나서 영광이었다"고 적었다. 닉슨은 트럼프에 "앞으로 (가치있는) 조언을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화답했다. 둘은 미식축구·부동산·베트남 전쟁·미디어 전략 등을 주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닉슨은 트럼프가 인수했던 뉴저지 제너럴스 풋볼팀을 어떻게 다룰지도 조언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2020년 일반에 공개됐다. 리처드 닉슨 재단의 수석 부사장인 짐 바이런은 AP통신에 "편지들은 자료 4600만장, 사진 30만장 등이 포함된 기록 보관소에서 2년간의 연구를 통해 발견됐다"고 전했다. 편지를 통해 트럼프에 닉슨이 어떤 영향을 줬는지 엿볼 수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와 닉슨은 '닮은꼴'이라고 평했다. 루크 니콜터 텍사스 A&M 대학 교수는 AP통신에 "두 사람은 서로 비슷했다"며 "강인함, 배짱, 심지어 정치적 타격을 입고 재기한 것도 비슷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30대에 전직 대통령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면서 "권위주의적인 두 명이 서로 호감을 느꼈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줬다"고 평했다. 트럼프는 1983년 10월 "내 야망 중 하나는 닉슨 부부를 트럼프타워 거주자로 모시는 것"이라면서 우호적으로 접근했다. 트럼프타워 입주를 적극 권했던 트럼프에게 닉슨은 "아내가 뇌졸중"이라며 고사했다.  


"트럼프 당신, 출마만 하면 당선될 것"  

 
닉슨은 처음부터 트럼프가 정치가로 성공할 거라고 예견했다. 1987년 12월 당시 41세 사업가였던 트럼프에게 닉슨은 대선 출마를 권유하는 듯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는 "내 아내가 트럼프 당신이 ‘도나휴 쇼’(MSNBC의 유명 토크쇼)에서 대단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출마 결심만 하면 당선될 것이라고 했다!”고 적었다. 트럼프는 이 편지를 액자에 넣어 트럼프 타워 내 사무실에 전시했다고 한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주 올랜도 인근에서 열린 AP 편집장 연례 회의에서 연설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모습. AP=연합뉴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주 올랜도 인근에서 열린 AP 편집장 연례 회의에서 연설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모습. AP=연합뉴스

 
둘 다 기성 언론을 불신했다. 1990년 닉슨은 트럼프가 언론의 비판을 받자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언론의 공격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며 "언론의 공격이 나를 당신 편으로 만든다"고 썼다. 닉슨은 워터게이트사건을 폭로해 자신을 사임하게 만든 언론을 매우 싫어했다. 트럼프도 언론과 늘 긴장 관계였다. 공교롭게도 트럼프를 해부한 책『분노』와 『공포』의 저자 밥 우드워드 전 워싱턴포스트(WP)기자는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다.

닉슨과 트럼프는 언론은 싫어하면서도 대중 매체인 TV는 성공의 발판으로 봤다. 닉슨은 "관객들은 TV 방송에 없어선 안 될 소품"이라면서 "미래에는 진짜 돈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가 리얼리티 쇼를 통해 인지도를 높인 것도 닉슨의 원포인트 조언 덕분일 수 있다.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샤이 트럼프'와 유사

 
트럼프는 닉슨과 교류하며 배운 점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 컨셉이 대표적이다. 닉슨은 1969년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며 미국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목소리를 내는 시끄러운 소수보다 침묵하는 다수가 훨씬 많다"는 취지로 연설했다. 이 때 '침묵하는 다수'라는 표현이 나왔다. 트럼프도 "나를 공격하는 건 시끄러운 소수이고, 침묵하는 다수는 내게 동조한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가 맞았다. 침묵하는 다수인 '샤이 트럼프'는 2016년, 그리고 2024년 트럼프 당선에 기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024년 11월 13일 워싱턴 DC의 하얏트 리젠시 호텔에서 하원 공화당 의원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024년 11월 13일 워싱턴 DC의 하얏트 리젠시 호텔에서 하원 공화당 의원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처음에는 높았던 닉슨에 대한 존경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사그러들었다고 AP통신은 평했다. 트럼프는 1993년 1월 26일 80세 생일을 맞은 닉슨에게 "위대한 당신에게 언제나 최고의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자랑스럽다"고 썼다. 이 편지가 마지막이었다. 닉슨은 1994년 4월 사망했다. 당시 트럼프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AP통신이 전했다.  

트럼프는 필요할 땐 닉슨과의 관계를 부각하면서도 그와 직접 비교되기는 거부했다. 트럼프는 앞서 2019년 자신에게 탄핵 위기가 닥쳤을 때 닉슨을 언급하며 "그는 떠났지만 나는 떠나지 않는다"며 "이는 큰 차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