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이탈리아만 건재하다…트럼프에 말 한마디 못하는 G7 [트럼프 어게인③]

자유무역과 국제질서를 근간으로 한 전통적인 서방 리더십이 ‘뉴 스트롱맨 시대’를 앞두고 흔들리고 있다. 오랜 기간 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다양성을 표방하며 상징적 정책에 집중하다가, 막상 경기침체와 치안불안 등 내치가 흔들리면서 리더십 자체가 약해진 결과다. 더는 스트롱맨이 판 치는 반자유주의적 물결을 견제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지난해 10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미·영·프·독 정상. 왼쪽부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0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미·영·프·독 정상. 왼쪽부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불신임 당한 유럽의 ‘쌍두마차’

서방 민주 진영을 대표해온 주요 7개국(G7) 중 유럽 리더국 상황이 특히 심각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가까운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빼곤 모두 정권이 불안한 상태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당장 세계 3대 경제권이자 민주주의 역사의 교과서와도 같은 유럽연합(EU)의 리더, 프랑스와 독일의 상황만 봐도 풍전등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총선에서 극우로 분류되는 국민연합(RN)을 견제하기 위해 극좌가 주도하는 신민중전선(NFP)과 손을 잡았다. 중도파가 우파보단 좌파와 연합하는 프랑스 정치 전통에 따른 것이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당에 올라선 NFP는 마크롱과 파워게임을 벌이다, 완전히 반대편인 RN의 손을 잡고 미셸 바르니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겉으론 바르니에 내각의 증세 및 긴축 예산 처리 시도를 문제 삼았지만, 진짜 목표는 마크롱이 옹립한 내각을 무너뜨리는 데 있었다. 1당으로서 총리 지명권을 행사하겠단 것이었다. NFP는 내친김에 마크롱에게 하야도 요구하고 있다.


독일도 올라프 숄츠 총리에 대한 연방의회의 불신임으로 다음달 총선을 앞두고 있다. 공교롭게도 독일 연정 역시 표면적으로는 프랑스와 동일한 예산 문제로 붕괴했다.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 출신인 숄츠 총리는 확장 재정 정책을 시도했지만, 건전 재정을 주장하던 연정 파트너 자유민주당(FDP)과 마찰을 빚고 결국 불신임 당했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 내각 불신임 과정에서 우파가 적극적인 모양새를 보였다. 프랑스에선 좌파 NFP가 반마크롱 노선을 보이자 키를 쥐고 있던 우파 RN이 가세하고, 독일에선 우파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이 사민당의 연정 제안을 뿌리쳐 내각 붕괴로 몰아갔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오른쪽)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회동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오른쪽)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회동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와 관련해선 서방의 중도좌파적 자유주의가 표방한 대규모 이민 수용 정책에 대한 지지가 쇠퇴하고 경기침체가 겹쳤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프랑스 총선 1차 투표에선 반이민을 전면에 내세운 RN이 1위로 올라설 정도로 지지세가 컸다. 

독일의 경우 사민당이 대마초 합법화, 성별자기결정법 등 사회개조 수준의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노동자‧저소득층‧여성단체 등의 반감을 산 점도 작용했다. 

이와 관련, 이재승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은 “유럽에선 극좌와 극우의 극단주의가 두드러지는데, 특히 극우파의 부상이 눈에 띈다”며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피로감 누적 등의 요인도 있지만, 이민자 유입에 따른 치안 불안 및 사회·경제적 비용 부담 등 국내적 문제가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 다양성’ 내세우다 정권 붕괴 

대서양을 사이에 둔 캐나다도 마찬가지다. 지지율 급락에 시달리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지난 6일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트뤼도는 “문화적 사회주의”란 비난을 받을 만큼 다양성 정책을 추진해 지지층에선 인기를 끌었었다.

하지만 한 해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인 결과, 물가와 주거비가 급등했고 여론이 악화하면서 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설상가상 트럼프로부터 “캐나다인들은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조롱까지 듣지만, 이같은 캐나다 내부의 정치 리더십 문제로 제대로 된 항의도 못하는 실정이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스스로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정가에선 스타머에 대해 “쓸 데 없이 세세하게 관리하려 든다(micromanaging)”, “의사결정이 너무 느리다”는 혹평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은 주요 결정을 집권 자민당 2인자인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간사장이 내리는 등 ‘이시바 총리 패싱’이 일어나고 있다.

G7 주요국 정권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정치적 중도파의 쇠퇴와 포퓰리즘의 등장, 고령화와 금융위기 등에 따른 재정적 압박으로 G7에서 안정적인 정부를 유지하게 어렵게 됐다”고 그 원인을 짚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4일(현지시간) 거처인 플로리다 마러라고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만나 나란히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4일(현지시간) 거처인 플로리다 마러라고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만나 나란히 엄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럼에도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유일하게 영향력이 탄탄한 지도자로 꼽힌다. 2022년 취임 전 8%대를 오가던 이탈리아 실업률을 5%대로 낮추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토대로 국내 기반을 확고히 한 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G7 회원국 리더 중 유일하게 트럼프와 친밀한 관계인 멜로니가 유럽의 대변인 역할을 할 거란 기대도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 조반니 오르시나 로마 루이스대 정치학과 교수는 CNN과 인터뷰에서 “독일에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 그리고 프랑스의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탈리아는 안정적인 정부를 가진 유일한 국가로서 트럼프에 대해 일종의 독점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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