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간) 방문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가전 유통채널 로우스 홈에는 중국 하이센스·메이디· TCL, 미국 월풀·메이텍 등 속에서 삼성전자·LG전자의 세탁기·냉장고가 진열돼 있었다. 라스베이거스=황수연 기자
지난 9일(현지시간) 방문한 미국 라스베이거스 가전 판매점 로우스홈. 미국 전역에 매장 1700여 곳을 둔 이 유통 매장에는 삼성전자·LG전자의 세탁기·냉장고가 ‘명당’ 자리에 전시돼 있었다. 그 옆엔 하이센스·메이디·TCL 등 중국 제품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내년 가전 양판점 풍경은 사뭇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중국산에 60%, 멕시코산에 25% 관세 부과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중국 가전의 저가 공세에 제동이 걸리는 동시에 중남미에 생산기지를 둔 한국 가전들도 타격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멕시코 현지 법무법인인 엄기웅 문두스 대표 변호사는 “미국 시장을 위한 생산기지로 굳은 멕시코에서 당장 떠나긴 어렵다 “중남미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어쨌든 4년을 버텨보자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 최우선주의’와 ‘상식의 혁명’을 외치며 트럼프 2기가 개막한 가운데 전자·가전 업계는 득실 계산에 분주하다. 반도체나 가전산업에서 직간접적 타격을 예상하지만, 일부 시장에서는 반사이익 가능성도 있어 기업들은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 중이다.
화웨이에 반도체 수출 제재가 처음 시작된 게 2019년, 트럼프 1기였다. 트럼프 2기는 ‘더 매운맛’이 예상된다. 중국의 인공지능(AI) 개발을 억누르기 위해 첨단 반도체 제재를 강화하고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역량을 키우려 하면, 한국 수출 주력품목인 반도체 산업은 다방면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미국 기업들 간 협력은 더 돈독해질 것으로 보인다”라며 “칩스법(반도체과학법) 보조금이 축소될 수 있고, 미국의 요구는 더 까다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보조금을 받는 한국 기업들은 중국 생산 설비를 활용하고 중국 시장 진출에 제약을 받는데, 중국을 발판 삼아 성장해온 한국 기업들이 힘든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가 중국의 범용(레거시) 반도체까지 옥죈다면 한국이 일부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첨단 반도체 공정을 차단하는 데 집중하고 범용 반도체 시장은 풀어줬다. 이 때문에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등 범용 제품 시장에서 중국 창신메모리(CXMT) 등의 저가 공세에 직면해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중국 DDR4가 한국 제품의 반값에 풀리면서 치킨게임이 시작됐다”라며 “미국이 중국 레거시 제품까지 제재하면 중국의 기술 추격을 막고 한국 기업들이 재고도 처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서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이를 들고 있다.AP
트럼프 대통령이 20일 취임 직후 멕시코·캐나다산 제품에 25% 관세 부과 계획을 밝히면서 한국 기업들의 중남미 생산기지는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 제품 생산 공장들은 트럼프 정책 시행 전까지 최대한 많은 물량을 미국으로 밀어넣기 위해 지난해 연말부터 생산·수출 물량을 대폭 늘렸다. 삼성전자는 멕시코 케레타·티후아나에 LG전자는 레이노사, 몬테레이에 공장을 운영 중이다. 일반적인 가전 영업이익률이 한 자릿수 대인 점을 고려할 때, 판매 가격을 높이지 않으면 적자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에 삼성전자·LG전자는 멕시코 생산 물량을 미국·한국을 포함해 다양한 생산기지로 이전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삼성전자의 멕시코 협력회사 관계자는 “추후 생산 물량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라며 “지난해 8월부터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관세가 25~35%까지 부과되고 있고, 멕시코 정부의 각종 요구도 늘어 한국 협력사들은 삼중고에 빠져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친환경 산업 정책인 ‘그린 뉴딜’ 종료를 선언한 만큼 그간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세액공제·저금리대출 지원을 받았던 사업들의 전략 수정도 불가피하다. 가전업계에선 IRA 바탕으로 성장한 히트펌프 등 가정용 고효율 냉난방 기구 시장이 그런 사례로 꼽힌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20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취임식에서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성상 미국의 산업 정책 방향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 정부 말기에 강화된 대중국 반도체 수출 제재에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반발하고 있고, ‘실세’ 일론 머스크가 중국에 우호적인 점 등을 비춰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전략적으로 중국과 대타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1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후 100일 이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측근들에게 밝혔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큰 상황이기에 미국의 정책 방향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기민하게 대응하는 역량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해리·이우림, 라스베이거스=황수연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