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여러 경로를 통해 몇 년째 아버지와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한해 전에는 문화예술인 금강산 방문단에 포함돼 북한 땅을 밟은 김에 아버지와 접촉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옌지의 숙소에서 받은 브로커의 전화는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다섯 달 전인 3월 22일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국민학생 때 헤어져 아버지를 또렷이 기억하는 형은 길게 울었지만 아무런 기억이 없는 나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 삶을 무겁게 짓누르던 부하(負荷), 제대로 된 사진조차 본 적 없어 막연한 추상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던 아버지가 결국 추상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한 시대가 마감된다는 생각이었고, 숱한 고통과 슬픔을 치르고 떠났으리라는 생각에 연민과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봉하러 갔다가 졸지에 망제 지내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난 12일 조선족 브로커로부터 팩스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고, 상봉을 위해 우선 이복 여동생 옥경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낮도깨비에 홀린 사람들처럼 작은형과 나는 이튿날 다시 옌지로 출국했고, 저녁에 여동생을 만났다. 서너 시간 가족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과연 여동생이 맞는지,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아버지의 최신 공민증을 제시해 달라고 브로커에게 요청했다.
할머니의 얼굴도 분명히 기억하는 작은형은 우리가 만났던 여성이 여동생이 맞다고 확신했다. 아름답기보다는 거칠고 남성적이었던 할머니의 모습이 여동생의 얼굴에도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작은형은 여동생이 고향 석보(경북 영양) 얘기를 잘 알더라며 아버지에게서 들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도 했다.
아버지는 독한 술을 드셔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법이 없으셨다는 여동생의 얘기가 기억난다. 술도 음식인데 기분 좋게 먹어야 한다고 평소 말씀하셨다는 거였다. 제딴에는 사는 형편이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였을 텐데, 다른 집들이 잡곡밥만 먹을 때 아버지 밥상에는 그래도 이밥(쌀밥)을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밥을 아버지는 꼭 절반만 드셨고 남은 절반을 자식들이 나눠 먹었다는데, 차마 목이 메어 아버지 혼자 쌀밥 한 그릇을 비울 수 있으셨을까 싶다.
(계속)
북한에 살던 이복 여동생 옥경이는 대뜸 이문열에게 “미군 특무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오빠를 미군 간첩으로 의심하게 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또 이문열은 아버지와의 상봉을 위해 김정일에게 편지도 썼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4610
이문열은 첫눈에 반했다…“마캉 다” 좋았던 못된 여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2327
어머니는 뱀꿈 꾸면 짐 쌌다…‘빨갱이 아버지’가 새긴 원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077
“부친 편지에 충격 받았다” 이문열은 왜 작가가 됐을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1853
“한강 노벨상 무조건 반갑다” 그럼에도 이문열이 우려한 것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3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