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중앙일보에서 만난 배우 김영옥은 "저는 그냥 할머니다. 가장 평범한 할머니상이다. 그렇게 표현해 주면 좋겠다"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말해도 여배우들의 '맏언니'다. 고(故) 김수미(1949~2024),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의 윤여정(78) 등 솔직한 화법으로 이름난 배우마다 롤모델로 ‘영옥 언니’를 꼽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하나도 대단할 거 없어. 닥치는 대로 사는 거죠.”
아흔 목전이라곤 믿기지 않는 힘 있는 목소리였다. 올해로 연기 인생 69년 차. 국내 최고령 현역 여배우 김영옥(87)을 지난 22일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한 날이었다. 평소엔 잘 안 쓴다는 마스크를 벗자, 세월에 농익은 미소가 드러났다. 지혜와 신중함, 도약의 에너지를 상징한다는 푸른 뱀의 해(乙巳年), 건강한 활동 비결부터 물었다.
“그냥 할 수 있는 대로 움직이는 거지, 무슨 비결이 있나요? 50대 때부터 되도록 하루 6~8시간은 자고 편식 안 하고 무리 안 하려 그러죠. 하지만 우리 일이 밤새고 불규칙할 때도 있잖아요. 근데 늦잠 자고 그렇게 살아도 큰 지장은 없는 것 같아.”
지난 6일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냥, 명이 긴가 봐요.”
글로벌 OTT 성공작마다 있다…최고령 현역 여배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에서 주인공 기훈(이정재)의 어머니 역할로 등장한 배우 김영옥. 사진 넷플릭스
성우‧연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그의 ‘최고령 현역’ 직함은 그저 나이 때문이 아니다. 솔직한 태도로 동시대와 소통해온 젊은 감각이 토대다.
글로벌 OTT 히트작 ‘오징어 게임’(2021, 넷플릭스), ‘파친코’(2022~2024, 애플TV+) 등 시대와 호흡해온 200여 편 드라마‧영화 출연작, 삶의 이야기를 노랫말에 실어낸 JTBC ‘뜨거운 씽어즈’(2022), ‘힙합의 민족’(2016) 등 음악 예능, 동시대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들여다본 EBS 교양 방송 ‘건축탐구 집’ 내레이션(2020년 한국방송대상 내레이션 상 수상)까지….
일도, 생각도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좇아왔다.
"존엄사 허용" 지지한 '소풍' 68년만에 여우주연상
영화 '소풍'(7일)에서 금순(김영옥, 왼쪽부터)과 은심(나문희)가 고향 남해에서 활짝 웃었다. 가족과 옛 사연에 얽힌 우여곡절 끝에 두 친구는 곱게 단장하고 소풍길에 오른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지난달 수상의 겹경사도 그런 행보의 결실이다. “존엄사가 허용되면 좋겠다. 피폐하게 드러누워 사는 건 삶이 아니다”라고 노년의 속내를 드러낸 영화 ‘소풍’(2024)으로 공동 주연 절친 나문희와 나란히 서울국제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데뷔 이래 처음 영화로 받은 주연상이다.
이어 SBS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선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로 공로상을 받았다(SBS 공로상은 2011년 받고 두 번째다). “100세 시대니, 그때까지 건강해서 (젊은 후배들도) 열심히 다방면으로 재주를 보여주길 바란다”는 소탈한 덕담으로 수상 소감을 대신했다. 이어 탄핵 정국 속 끝인사도 화제에 올랐다. “안개 속에 있는 연말 같은데 내년에는 모두 좋고 아름답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역사의 산 증인이 건넨 뼈 있는 당부였다.
그는 1938년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나 8‧15 해방을 맞았다. 6‧25 전쟁 땐 연세대에 다니던 큰오빠가 인민군에 강제징집 됐고, 작은오빠는 국군으로 참전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흡사 그의 가족사였다. “지금 내가 어릴 때 살던 종로 사직동에 돌아와 사는데, 일제강점기 때 방공호 연습하고, 폭탄 파편 맞지 말라고 어머니가 솜 모자를 씌워준 기억이 여태 생생하죠.”
“우리 민족이 참 대단하다”고 운을 뗀 그가 가만히 덧붙였다. “그 시대를 버텨온 나라인데, 지금 왜들 이러나. 참 슬픕니다.”
"연기 대본이 학습지, 아픈 경험이 영양제였죠"
2023년 MBN 예능 '모던패밀리'에 공개된 김영옥(왼쪽 두번째부터)과 남편 김영길, 자녀들(1남 2녀). 남편 김씨는 중앙대 동문으로 처음 만나, 춘천방송국 아나운서 시절 백년가약을 맺었다. 올해로 결혼 66년차다. 사진 MBN
혼란한 시절마다 돌파구를 찾아내온 그의 삶이다. 연기 대본이 그에겐 ‘학습지’였다. “어떤 역할이건 나를 숨기려 해도 전혀 배제할 순 없어요. 연기하며 남의 인생을 도둑질해보면 얼마나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는 것, 어떻게 살아야겠다 대처법을 배우죠.”
고교 시절 연극반을 하다가 1957년 연극 ‘원숭이손’ 무대로 데뷔했다. 대학을 다니며 한국 최초 TV 방송국 HLZK-TV 탤런트, 춘천방송국 아나운서를 거쳤지만, 기어코 연극판에 돌아갔다. 당대 최고 극작가 차범석의 극단 ‘산하’에 28년간 몸담았다. 그 때 배운 연기의 기본기로 성우(CBS 5기, MBC 1기)를 거쳐 다시 배우가 됐다.
“돈 한 푼 안 받고 1년에 한두 편 훈련과정으로 연극을 했죠. 연극 하느라 오밤중에 들어오고, 아이들 홍역을 앓을 때도 못 들여다보고. 우리 어머니, 남편도 고생했죠. 어쩌면 그렇게 철없이 했나, 그땐 그것도 모르고 지나왔죠. 근데 일이 들어오면 욕심이 나. 지금도 설레요.”
K드라마 치매 연기 1호…'올미다' 할미넴이 전환점
배우 김영옥이 한국 드라마 최초로 치매 환자를 연기해 주목받은 드라마 '옛날의 금잔디'(1991~1992). 그가 동년배 배우들과 출연한 KBS2 예능 '마마도'(2013~2014)에 방영된 자료 화면이다. 사진 KBS
30대 때 일찍부터 노역을 시작해, KBS ‘옛날의 금잔디’(1991)에선 한국 드라마 최초로 치매 연기를 했다.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1996년 KBS 원작, 21년 만의 tvN 리메이크판에 모두 치매 노모 역할로 출연했다. 이를 비롯해 ‘내가 사는 이유’(1997, MBC), ‘화려한 시절’(SBS, 2001~2002), ‘고독’(2002, KBS2), ‘디어 마이 프렌즈’(2016, tvN) 등 노희경 작가의 작품에선 역할의 크기와 관계없이 좋은 삶을 켜켜이 쌓아왔다.
할머니 전문 배우의 영역을 확장한 게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2005, KBS2)부터다. 본명을 딴 캐릭터를 만나, 호탕한 본모습이 튀어나왔다. 무례한 식당 주인에게 속사포 응징을 퍼붓는 장면에 ‘할미넴’(할머니+미국 래퍼 에미넴)이란 별명이 생겼다. 젊은 팬과 소통하는 재미도 맛봤다.
“배우로서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때 팬들이 여태까지 15주년, 20주년이라고 파티를 열어주는 게 늘 감사하죠.”
"내 일기장이 너희 역사책" 할미판 자작 랩 화제
이어 음악 예능 ‘힙합의 민족’에선 진짜 할머니 래퍼에 도전했다. 이런 자작 랩도 화제에 올랐다. “내 어릴 적 썼던 일기장이 너희들에겐 역사책이다/누가 봐도 나는 할미다/그래도 내가 할 말은 합니다/얘들아 이게 진짜 힙합이다….”
중장년 배우 합창 예능 ‘뜨거운 씽어즈’에서 그가 부른 커버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는 유튜브 조회수가 도합 400만을 넘었다. 먼저 떠난 이가 남은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노랫말이 백발 노배우의 지극한 음성과 만나 “먼저 간 아이가 불러준 노래 같다”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난다” 등 공감 댓글이 잇따르면서다.
김용림‧정혜선 “언니 노래는 후벼 파는 게 있다”
어느 날 그가 부른 정훈희의 ‘꽃밭에서’를 들은 배우 김용림‧정혜선이 “언니 노래는 후벼 파는 게 있다”고 했단다.
“내가 박치에요. 음정‧실력을 떠나서 대중도 어떤 할머니가 그냥 앞날을 환상적으로 얘기해준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또 그러면 된다고 생각해요.”
‘뜨거운 씽어즈’도 “배우들이라 그런지 전해오는 감정이 다르다”는 반응이 흐뭇했다고 한다. “연기도 똑같아요. 대사 안 틀리고 해내는 게 사명이 아니거든. 얼마만큼 시청자를 사로잡아야 하나. 배우는 평생 그 욕심을 내고 살아야죠.”
반신불수 손자 10년째 돌봐…"매사 긍정적, 잘 늙으려 노력"
음악은 김영옥에게 연기와는 또 다른 표현 창구이자, 에너지의 원천. 사진 촬영 중에도 애창곡 선율을 흥얼거렸다. "젊을 적에 트로트, 팝송, 클래식 가리지 않고 짬뽕으로 들었다"는 그는 "한 곡의 노래가 드라마 한편이나 다름없다"고 했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그는 2015년 무면허 음주 차량에 치여 반신불수가 된 손자를 10년째 돌봐왔다고 고백했다. 2년 전엔 그가 샤워 중 미끄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뼈에 금이 가 한 살 많은 남편이 소변까지 받아냈다. “이대로 못 일어나는 거 아닌가” 두렵기도 했다. “두 달 빡세게 고생했죠. 근데 그게 고쳐지고, 회생할 때 희열이 남달라요. 노인이든, 청년이든 그런 얘긴 해주고 싶죠. 뭐든 아픈데 참지 말고 열심히 치료받아라.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평안하게 사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그러고 보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지는 게 이상하다” 할 만큼 깊은 슬픔을 겪어도, 곰삭힌 후의 깨달음까지 보태어 고백해온 그다. “삶이 다 좋기만 한 사람은 하나도 없더군요. 잘 살고 못 살고는 차이가 없고 불만은 어디에나 있어요. 사람이니까, 이런 일도 겪는 거고, 그냥 훌훌 털어버리는 걸 내가 잘해요. 잘 늙으려고 노력하는 건 있죠.”
직접 집을 짓는 이들의 철학을 담은 EBS 교양방송 '건축탐구 집'. 김영옥은 이 프로그램으로 성우 경력을 살려, 2020년 한국방송대상 내레이션 상을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똑똑하고 감각이 남다른 사람이 많다고 느꼈다″면서 ″내 자식도 그렇고, 누구든 어디로 다르게 뻗은 재능이 있다면 과감하게 해보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지론을 재확인했다. ″그렇게 용기를 갖고 과감하게 해나가는 분위기가 번져간다면 우리나라에 일조한다는 생각도 들죠. 이 프로그램을 그래서 못 그만둬요.″ '건축탐구 집'은 매주 화요일밤 EBS에서 본방이 방송된다. 사진 EBS
요즘은 곧 출연할 음악방송을 위해 새로운 곡을 연습하느라 여념이 없다. 배우 박인환과 연상연하 부부로 코믹 호흡을 발휘한 드라마 ‘다리미 패밀리’(KBS2)도 26일 밤 종영을 앞두고 있다.
그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 ‘현역 가왕 2’(MBN)에서 얼마 전 작곡가 윤명선이 한 참가자에 했던 칭찬을 언급했다. “삶의 경험이 (가창력에) 영양제가 됐다고, 하늘에 감사하라 그랬는데 꼭 나한테 하는 얘기 같기도 했죠. 타고난 재능도 중하지만, 경험이 밑바탕이 되면 가슴을 울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해온 장수 명배우의 진짜 비법이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