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오케인, Conversation, oil on canvas, 130x100cm, 2024 갤러리바톤 제공.
캔버스 천을 유령처럼 뒤집어쓴 사람, 천을 잡고 늘리고 잡아당기는 인물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데이비드 오케인의 신작에는 회화 작업의 재료인 하얀 캔버스 천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아티스트의 할 일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한 영화감독의 말을 좋아한다는 작가는 “작품 속 캔버스는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동시에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며 독특한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데이비드 오케인, Catching Light, oil on canvas, 140x100cm, 2024 갤러리바톤 제공.
오케인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을 무대로 삼는 작가다.독일 라이프치히 순수미술 아카데미에서 ‘신(新) 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작가 네오 라우흐를 5년간 사사했다. 아일랜드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골드플리스어워드를 수상(2014년)했고, 독일 쿤스트할레 슈파카세 라이프치히와 영국 자블루도비치 컬렉션 등 세계 각지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등 주목을 받는 작가다.
2월 15일까지 서울 한남동 갤리리바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자화상 ‘대화(Conversation)’는 눈여겨볼 작품이다. 궁정 화가였던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시녀들’의 시선 구성을 일부 따른다. 벨라스케스처럼 작품 속 화가 역시 이젤 앞에 서 있다. 천을 뒤집어쓴 탓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지만, 작가는 “안 보이기 때문에 인물의 존재감이 커지는 역설이다”라고 말한다. 벽에 걸린 작품은 ‘극 중 극’처럼 그림 속 세상이 펼쳐진다. 작가는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장면을 가리키며 ‘도넛 가운데 구멍(환상)이 아닌 도넛(현실)을 보라’고 말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을 언급했다. 거울로 비친 동양화 붓은 지난 개인전 때 갤러리바톤에서 선물 받은 것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덧붙였다.
데이비드 오케인 '자아의 교향곡' 전시 전경. 갤러리바톤 제공.
전시에서 그는 캔버스 천이 등장하는 신작 23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인 ‘자아의 교향곡’은 2020년 발행된 동명의 책에서 따왔다. 한 사람의 자아란 하나의 속성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림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자아의 속성을 탐구한다. 작가의 두 조카가 캔버스 천을 가지고 이리저리 게임하는 모습을 포착한 작은 사이즈의 연작, ‘마야(Maya)’는 이를 잘 반영한다. 오케인은 “산스크리트어로 ‘마야(maya)’는 환영(幻影)을 뜻한다”라면서 “이 어원이 파생되어 영어로 ‘물질(material)’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게 된 점이 흥미로운 지점”이라며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짚었다.
데이비드 오케인, Gloaming, oil on canvas, 140x100cm, 2024 갤러리바톤 제공.
미술사적 해석과 독자적 이야기 공존하는 장면들
그림 속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한 예술가가 그림을 덮은 천을 벗기는 순간을 그린 ‘박명(Gloaming), 여명(Zwielicht/Dawn)’ 3부작은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작가 자신이 추상화되는 접근 방법은 20세기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배경은 야외 풍경을 그대로 묘사한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 극적인 연출에 대해 작가는 “현실 세계에서도 일종의 연극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예로 들었다. 사람들이 동굴 속 비친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믿은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 체계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해 보자는 의미다.
작가 데이비드 오케인(David O’Kane). 갤러리바톤 제공
이소진 기자 lee.sojin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