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청년대 결성식 강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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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덮였던 음울한 구름이 걷히고 40년 만에 새로운 햇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장기 밑에 고향을 떠나던 그대들, 일장기를 흔들면서 그대들을 보내던 우리들의 가슴은 어떠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끌리어 가는 그대들을 소리 없는 눈물로 전송하던 우리들의 가슴엔 납덩이처럼 무거운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쇠사슬은 풀리어지고 납덩이는 녹아져 버렸습니다. 그러하던 날 우리들의 역사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8월 17일 학교 교정에서 해방의 만세를 외치던 그 순간, 여러분의 눈에 한결같이 번쩍이는 걸 나는 보았습니다. 그건 감격의 눈물이라고만 하기엔 너무나 표현이 부족합니다. 지나간 40년의 지극한 쓰라림이 가슴에 서리어 피눈물이 된 것이겠지요. 갑자기 닥친 광명이 너무나 눈부시어 하도 벅찬 기쁨에 저절로 눈물이 용솟음친 게지요.
여러분 우리는 이 성스러운 눈물을 헛되이하지 말고 그 순된 눈물을 살리어 언제까지든지 그 순간의 그 마음으로 신국가 건설에 매진합시다.
[스와데시의 복음에 이르기를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일부가 되어 버렸다. 인간은 벌써 그에 대해서 하등의 구채권(求債權)도 갖지 않는다. 과거의 부정과 모욕에 대해서 복수를 생각지 말라. 죽어버린 과거는 깨끗이 묻어버림이 좋다. 살아있는 현재에 우리들의 마음과 신(神)을 길잡이로 하여 행동하자.”]
![1905년에 시작된 스와데시운동은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양상이 되었다. 검소한 생활로 경제적 자립을 기할 것을 핵심 강령으로 삼았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2/15/117e9e98-10c3-4c76-87cf-252eba94e019.jpg)
1905년에 시작된 스와데시운동은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양상이 되었다. 검소한 생활로 경제적 자립을 기할 것을 핵심 강령으로 삼았다.
기미년의 독립선언서에도 “자기를 채찍질하기에 급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고 현재를 바로잡기에 바쁜 우리는 지난날의 잘잘못을 가릴 여가가 없다. 오늘날 우리의 할 일은 오로지 자기를 건설함에만 있고 남을 파괴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질 않았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파괴보다도 건설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제일 명심할 철칙일까 합니다.
지난 8월 15일 이후의 우리는 40년래의 제일 큰 명절을 맞이했습니다. 설과 한가위가 모두 명절이지요마는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에 비길 수 없는 큰 명절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러한 명절에 사원을 풀고 야료를 하다니 말이 됩니까. 더욱이 면서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는 구명도생(求命徒生)한 죄밖에. 징용은 면서기가 보낸 것이 아니고 일본 국가가 보낸 것을 우리는 명념해야 합니다. 그 면서기가 아닐지라도 다른 사람이 대신했을 것입니다.
악행의 근원은 모르고 그 심부름꾼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면장, 면서기와 학교선생을 친일가라고 추궁하지 맙시다. 일본 치하의 조선 내지에 있어서 친일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일장기를 손에 대지 않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이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그야 송죽(松竹)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이 오히려 무색할 만큼 절조를 지킨 분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지하운동에 분주하신 분도 많지요마는 대다수의 우리들은 목숨에 얽매여서 불행한 친일가였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 자신에 얼굴이 뜨뜻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오십보이소백보(五十步而笑百步)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되풀이하지 맙시다. 거듭 외칩니다. 친일자를 추궁하지 맙시다. 그리하여 삼천만 동포에 한 사람의 낙오자도 내지 말고 모두 손에 손을 이끌고 신국가의 건설에 매진합시다.
동포란 말은 피를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어머니의 배는 다를지언정 조상의 피를 같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동포들입니다.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서로 용서하고 묻어 주어야지 왜 꿈에라도 서로 헐고뜯을 것입니까. 모든 잘잘못을 더욱이 일본 질곡 하의 그것을 말끔히 물에 흘려버리고 삼천만 동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손을 맞잡고 나아갑시다.
나는 아까 친일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말했지요만 그걸 거꾸로 말하면 진정한 친일자는 없었다고 나는 봅니다. 우리들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악랄한 동화정책 밑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얽매여 구구한 목숨을 부지하느라고 살아도 죽은 척했을 뿐이지 누가 진심으로 일본에의 충량한 신민이야 있었겠습니까. 그야 더러운 명리를 탐해서 조국에 화살을 겨눈 죽일 놈도 있었지요마는 그는 예외이고 적어도 우리 지방에 그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나는 봅니다.
사람은 흔히 근시안이기 때문에 눈앞을 가리운 표풍(飄風)과 취우(驟雨)를 영원한 것으로 알고 흐린 날은 언제고 개일 때가 있다는 너무나 명백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정신상의 착오를 범한 사람이야 있었겠지요. 그러나 진정 환장한 사람이나 허파가 뒤집힌 사람이 아니면 뉘가 진심으로 친일한 사람이야 있었겠습니까. 그야 이번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문을 듣고 인제 우리는 못 살게 되었다고 엉엉 운 조선인 소학생이 있었답니다.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거센 바람이 아침내 가지 않고 쏟아지는 비가 하루를 다하지 않는다.) 〈노자(老子)〉]
그러한 착각을 가진 어른도 없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이례(異例)는 일본의 교육이 얼마나 심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고 그들이 앞으로도 가시어지지 않을 친일의 고질(痼疾)에 걸렸다고는 볼 수 없는 바입니다. 새 교육을 받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조선의 새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소학생을 친일가로 추궁할 사람이 있다면 남이 웃을 것 아닙니까. 우리들의 친일가 추궁은 다 이와 비슷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앞날엔 광명이 있으니 이 좋은 명절에 조금이라도 질서를 문란하는 일 없이 대국민의 긍지를 가집시다.
그러나 다소의 소란이 있었다고 조금도 비관할 건 없습니다. 이래서야 어디 질서 있는 독립국민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기우(杞憂)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가 본 바로는 준렬한 경찰국가에서 갑자기 무정부 상태로 된 국가민족 치고 현하의 조선처럼 큰 파란 없이 지낸 나라는 별로 없습니다. 이건 조선사람의 천성이 순하고 인자한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니까 좀 더 떠들어도 좋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앞으로도 더욱 계신(戒愼)해서 이 빛난 역사의 페이지를 한층 더 아름답게 꾸며야 하겠습니다.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마는 일본은 40년 동안 우리에게 민족으로서의 자신(自信)을 잃어버리도록 교육해 왔습니다. 그 덕택으로 오늘날 조선사람들은 내남없이 민족적으로 비관하고 낙망하길 잘합니다. 심하면 인류의 공통된 약점, 인간으로서의 불가피한 허물까지를 가지고 이러니까 조선사람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을 나는 흔히 보았습니다. 소물실망(小勿失望, 조금도 실망하지 말 것)하라는 민 충정공의 우리 민족에게 남긴 유언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개인이나 민족을 물론하고 실속도 없이 너무 날치는 것은 나쁘지요마는 아주 자신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더욱 질색입니다.
저번 날도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은근히 걱정하기를 일본 시대에도 일인 관리보다 조선인 하급관리가 악랄한 짓을 더 많이 했으니 그네들이 과연 행정을 잘 운영해 나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원인을 첫째, 일인 치하에 그리 우수한 조선인 관리가 (더욱이 순사 나부랑이에) 적었다는 것이며 둘째, 신분의 보장이 없고 더욱이 생활의 보장이 없으니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려면 다소 나쁜 짓이라도 아니할 수 없었고 셋째, 민중과의 접촉면에만 배치되어서 위에 있는 일인 상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다 보니 결과는 욕을 도맡아놓고 먹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했습니다.
[일본인이 인정 있다는 말]
세상에서 흔히 걱정하는 만주 북중국의 조선사람 아편장수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들은 조국을 쫓겨나다시피 해서 아무런 희망을 잡지 못하는 보헤미안으로 정치적 배경이 없으매 이국에서 정상적인 경제적 발전을 기할 수 없고 더욱이 민족적 훈련이 용허되지 않으매 도의적 견제도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상적인 해외 발전의 길만 열리었다면야 누가 즐겨서 사기와 협잡을 하겠습니까. 사기와 협잡을 해도 좋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고국을 등진 민족이 이역에서 생활의 방도가 끊이매 좋지 못한 상로(商路)에 물드는 거야 그 사람 개인을 탄할 수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민족적으로 비관할 재료는 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웅비하는 나라 중에서도 정상적 해외무역의 길이 끊기면 곧 해적으로 변한 실례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당파성. 우리는 이로써 나라를 말아먹은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도 아직 그 못된 버릇을 개를 주어버리지 못했음인지 오늘날도 무슨 당 무슨 단 하고 여러 가지 당을 모아서 대동단결에의 길이 요원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조 후년 사색당론의 고질화는 극단적 쇄국주의 하에 국민의 감정이 밖으로 산화하지 못하고 안으로 발효한 때문이 아닐까요. 그건 우리네들 가정에서 형제, 부부, 부모자식의 지친간일지라도 밖으로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이 없이 밤낮으로 서로 얼굴만 치어다보고 앉았으면 감정의 격화를 초래하기 일쑤인 것과 마찬가지 경향이 아닐는지요. 또 물이 처음엔 골짝골짝이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다가도 결국은 합쳐서 큰 강을 이루는 거와 같아서 오히려 그게 자연발생적일는지도 모를 것이며 또 경쟁은 발전의 모태라고도 하니 그러한 각당 분립의 세가 악성화하지만 않으면 도리어 반가워할 현상이 아닐는지요. 모쪼록 그러하기를 염원하는 바이며 또 그리되도록 우리들의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일국일당(一國一黨)이 반드시 좋은 게 아니다.]
또 우리들은 천성으로 비겁하고 나약한 민족인 것처럼 배웠고 따라서 우리들 중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역사를 들춰 보십시오. 수군(隋軍) 백만을 청천강에서 무찌른 을지문덕은 우리들의 조상이 아닙니까. 당 태종의 십만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치고 안시성에서 그 오만한 이세민의 눈을 뺀 것도 일본사람이거나 미국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습니다. 다시 거란을 막아낸 강감찬은, 일본을 몰아낸 이순신은 어떠했습니까. 임진란을 그네들은 이겼노라 하지만 정작 이겼을진댄 삼백 년 전에 우리들의 조상은 이미 일본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임란은 이번 일미(日米)전쟁과 같이 육군은 침략의 준비를 완성한 일군이 아닌 밤중의 화적떼처럼 삼천리강산을 파죽지세로 밀어 갔습니다마는 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연거푸 전멸을 당해서 보급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7년 대역(大役)에 아무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다만 그 침략을 좋아하는 그 악독한 천성을 보였을 뿐 흐지부지 군대를 되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필법으로 간다면 수백년 후에 또 일미전에는 일본이 이겼노라고 안간힘 쓰는 축이 생길는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키나와전 후에 “오키나와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하던 깜찍한 그들이 아닙니까.
[동아 약소민족 해방이라는 일본의 전시(戰是)가 실현했으니 나는 그러한 의미로 대동아전에 일본이 이겼다고 본다.]
일천 년 전의 을지문덕과 삼백 년 전의 이순신은 그만두고라도 문약(文弱)의 폐풍이 민족의 고질이 되다시피 한 최근세에 제정 러시아의 남하세력을 흑룡강에서 막아서 만주로 하여금 오늘날의 만주로 만든 사람들이 그 뉘였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청국(淸國)에서 그 우수한 기술 때문에 요청해 간 삼백 명의 조선 조총사(鳥銃士)였다고 합니다. 이건 앞날의 만주의 운명과 아울러 생각해 볼 때 재미있는 사료가 아닐까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조상은 집단적으로 우수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퍽이나 꿋꿋하고 늠름했습니다. 저 단종조 사육신이 불에 벌-겋게 달군 쇳가치로 배를 지질 때 이윽고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라”고 외쳤다는 사실이나 [南秋江의 말] [해설 : 유응부(? - 1456)가 고문받으며 한 말로 남효온(추강, 1454-1492)의 〈육신전(六臣傳)〉을 통해 전해진다.] 가까이는 대원군 시절에 순교한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신인(神人)이 공읍(共泣)할 초인의 의지력, 그중에서도 남상교(南尙敎)가 그 아들 남종삼(南鍾三)에게 용감한 최후를 가지라고 타이른 일이며 남 승지의 누이가 충주 목계강(牧溪江)에서 몸을 던졌단 이야기며 더욱이 홍봉주(洪鳳周) 김장운(金長雲) 등이 형사(刑死)할 때의 형조의 계문(啓文)에도 “堅如鐵石, 雖遭慘刑, 示死靡悔, 自顧所犯, 萬死無惜(굳건함이 철석과 같아 참혹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죽음 앞에 후회함이 없고 저지른 일을 스스로 돌아봄에 만 번 죽어도 애석함이 없다.) 운운”이라고 쓰여 있음으로 보아 불과 7-80년 전에 우리의 동포 중에 이처럼 용맹과감한 사람들이 있었음은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일인은 조선사람은 노래조차 망국적이라고. 아리랑타령의 애조(哀調)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는 따위의 퇴폐적 기분이 그 대표적인 것일까 합니다. 그러나 왜 그것뿐이겠습니까.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찌타 능연각(凌煙閣) 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 김종서(金宗瑞)
라든가
[해설 : 능연각(凌煙閣)은 당 태종이 공신들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벽상(壁上)에 칼이 울고 흉중(胸中)에 피가 뛴다.
살 오른 두 팔뚝이 밤낮으로 들먹이니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만 하여라”
하는 시조도 틀림없는 우리 조상의 지은 것이고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날이 있으랴”
하는 포은(圃隱) 선생의 단심가(丹心歌)는 일본의 우미유카바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는 노래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해설 : “우미유카바”는 8세기 중엽 편찬된 〈만요슈(萬葉集)〉에 실린 글로 1937년 곡이 붙어 해군 군가로 널리 알려졌다. “海行かば水漬く屍 / 山行かば草生す屍 / 大君の / 辺にこそ死なめ / かえりみは / せじ (바다로 가면 물에 잠기고 / 산으로 가면 풀에 덮입니다. / 님이시여, 곁에서 죽겠습니다. / 돌아보지 않겠습니다.)”]
[녹이상제(騄駬霜蹄)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龍泉雪鍔)을 들게 갈아 둘러매고,
장부(丈夫)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세워 볼까 하노라. / 최영(崔瑩)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단아장(斷我腸)을 하는고. / 이순신(李舜臣)
군산(群山)을 삭평(削平)턴들 동정호(洞庭湖) 넓어지며
계수(桂樹)를 버이던들 달이 더욱 밝을 것을
뜻 두고 이루지 못하니 늙기 설허 하노라. / 이완(李浣)
대붕(大鵬)을 손으로 잡아 번개불에 구워먹고
곤륜산(崑崙山) 옆에 끼고 북해(北海)를 건너뛰니
태산(泰山)이 발길에 차이어 웨각대각 하더라.]
그러나 조선사람이 천성으로 순한 민족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까 합니다. 역사상으로 보아도 남의 침략을 받은 일은 비일비재하나 이쪽에서 나아가 남을 침략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묘청의 북벌칭제론(北伐稱帝論)이, 최영의 공요안(攻遼案)이, 효종의 북벌 계획이 모두 역사상의 꿈이 되어버리고 윤관의 여진 정벌이거나 세종의 대마도 정벌은 모두 동아의 대국에 큰 변동을 가져오지 못했고 그나마 저쪽의 산발적인 도적질과 북새통에 시달리다 못해서 한 번 혼내 주려고 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조상이 지극히 순하고 또 침략적이 아니었다고 조금도 비관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설사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가난하달지라도 우리들의 조상이 도적질할 줄 몰랐고 또 도적질할 념의를 내지 않았다고 털끝만치도 우리 조상을 원망하지 않으렵니다. 이즈음 이웃나라에 닥친 일을 볼지라도 침략의 업보가 만만치 않음을 알 것 아닙니까.
“천하비수검(天下匕首劒)을 한 데 모아 비를 매어
남만북적(南蠻北狄)을 다 쓸어 버린 후에
그 쇠로 호미를 만들어 강상전(江上田)을 매리라.”
하는 것이 우리 조상의 티피컬한 심경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조상이 유난히 잘났고 모든 일을 다 잘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디든 얼빠진 구석이 있었기에 4천 년 역사를 말아 자시었겠지요. 또 우리들은 오죽 못났기에 4십 년 동안 남의 노예 생활에 감심(甘心)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 이러한 오점이 찍히었다고 조금도 슬퍼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다는 진부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는 항상 융체(隆替)와 기복(起伏)의 연속이어니 우리에겐 이제 오랫동안의 겁운(劫運)이 물러가고 새로운 희망이 우리를 손짓해 부르지 않습니까. 더욱이 골로브닌의 말을 듣더라도 천성(天成)으로 강하고 우수한 민족도 없으려니와 그와 반대로 천성으로 비겁하고 나약한 민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지도자의 훈련과 교육 여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그는 러시아의 댜뉴브 강변의 어떤 마을이 전에는 한두 사람의 화적이 들어온단 말을 듣고 온마을 사람들이 산중에 피란을 갔었는데 그후 적절한 지도자의 훈련을 받아서 60년 후엔 서구의 침략군에 대해서도 까딱 아니하고 감연히 일어나서 마을을 지켰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장래의 운명도 금후의 훈련과 교육 여하에 있음을 절실히 느끼는 바입니다.
[일본유수기]
![러시아 항해가 바실리 골로브닌(1776-1831)은 1811-13년 2년간 일본에 잡혀 있었고 풀려난 후 〈일본유수기(日本幽囚記)〉를 썼다.](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2/15/528dabbc-91a3-48de-b2a5-9630b8c9a8cb.jpg)
러시아 항해가 바실리 골로브닌(1776-1831)은 1811-13년 2년간 일본에 잡혀 있었고 풀려난 후 〈일본유수기(日本幽囚記)〉를 썼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장보고가 미구에 망하고 따라서 청해진이 흐지부지되어 버린 일이지요마는 조선사람의 바다에의 진출은 비록 조직적이 아니나마 그 후에도 오래 계속되었고 고려 시절에도 배 타는 기술이 유난히 능란했기 때문에 당시의 동양무역의 중심지 유구(琉球)엔 고려 선인(船人)이 많았다는 사실이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저 17세기 영국 최초의 중국 사절 매카트니의 사행 기록에도 싱가포르 말라카 등지의 무역선에 코리아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청해진의 끄나풀이 비록 조국에는 용납되지 않았을망정 대대로 동양의 바다를 횡행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이순신 장군이 세계서 제일 먼저 군함을 만들어 일본의 침략을 무찌른 역사가 어찌 우연으로 생기었으리까. 나는 이걸 청해진 천년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해설 : 매카트니 사행을 “17세기”라 한 것은 착오다. 18세기 말 중국과의 무역 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은 1787년 캐스카트 대령을 첫 사절로 보냈으나 항해 중에 병사하고, 1793년에 조지 매카트니를 사절로 보냈다. 매카트니를 통한 영국의 요청은 모두 거부되었으나 중국 사정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을 늘리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金澤庄三郞] 가나자와 쇼사부로는 메이지시대 일본 언어학자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제창자의 하나다. 필자가 일선동조론을 언급할지 생각하며 이 이름을 적어놓은 듯.
그뿐만 아니고 조선사람은 문화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해 줍니다. 우리 한글이 세계에서 제일 나은 건 우리 아닌 일본과 서양의 학자들이 입을 갖추어 말해주는 바입니다. 모든 문화의 근원인 문자(文字)가 세계에서 뛰어나게 탁월하다는 것은 자다가 문득 생각해 보아도 저절로 웃음이 나는 일입니다. 만약 한글이 없는 조선을 떠올린다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칠 노릇입니다. 독립의 의의도 반감할 것이외다.
[가나(假名)과의 비교. 한문을 숭상함은 불가. 문자는 문화의 초석.]
나는 전에도 말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이조 5백 년의 공죄(功罪)를 따진다면 다른 모든 허물을 세종대왕님의 한글 하나로 상쇄하고도 오히려 혜택이 더 많으리라고 믿습니다. 세계에서 군함을 제일 먼저 만든 나라가 조선이란 건 아까도 말씀드렸지요마는 활자와 천문대와 측우기도 역시 조선이 제일 먼저 만들었습니다. 경주의 석굴암은 1200년 전의 조선의 물리학의 수준이 오늘날의 세계 학자로 하여금 경이의 탄성을 발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앞선 일본의 문화도 그 근원을 캐면 조선이 스승이었습니다. 왕인 박사와 담징화상은 조선사람일시 분명합니다. 우리 조상은 어릴 적 일본의 훈장이었고 그때 우리의 조상이 그린 그림은 호류지(法隆寺)의 벽화로 끔찍이 떠받드는 국보가 된 것입니다. 저네들의 고대문학의 첫 번째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보더라도 야마토(大和)시대의 일본인에겐 조선사람을 천상인(天上人)처럼 높이 우러렀고 조선에서 건너간 문물은 선진국의 수입문화로 백번 절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린 모양입니다. 나는 겐지모노가타리를 읽으면서 고려 관상가(こまの相人)니 고려 피리(こま笛)니 고려 음악(こま樂)이니 하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끼었습니다마는 그 반면에 오늘날의 현상에 생각이 미치면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습니다. 옛날 글 배워준 아이들의 종이 되었으니까요.
개인이거나 국가 민족이거나 향상에의 지향이 무뎌지고 침체 윤락하면 참혹한 구렁에 빠지게 되는 예를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그러한 실수가 없도록 다시 마음을 도사리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옛날만 문화적 소질이 높았을 뿐 아니라 최근에도 일본-조선인의 교육에 다년 종사한 일본 심리학계의 태두 구로다 아키라(黑田亮) 박사가 자기의 교육 경험과 또 심리학적 실험의 결과로 조선사람이 일본사람보다 훨씬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직접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체력은 어떠할까요. 그건 손기정 씨가 무엇보다도 단적으로 세계에 입증한 것이니 더 이러니저러니 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조금이라도 위구를 품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민족적 자신(自信)을 붙잡으십시오. 우리들의 조상은 결코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세계에서 우수한 민족이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에서 으뜸가는 천재적 독창력이 있고 세계를 제패할 체력이 있습니다. 세계사의 필연으로 독립이 이루어진 오늘날 우리는 이 문화의 묵은 터전에 그 체력으로 그 독창력으로 찬란한 새 조선 문화를 창조하여 세계문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독립이 되면 과연 무엇이 좋을까, 나는 전날 다섯 가지 조목을 들어서 학교 아이들에게 들려준 일이 있습니다. 나 개인으로 말하면 이때까지 죄인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살던 것이 한 사람의 자유시민으로 일생을 보낼 수 있고 또 언제 잡혀갈까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꿈에도 가위눌리던 것이 인제 네 활개 뻗고 살 수 있으니 눈물겹도록 반가워할 일입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나도 이 민족이 국가의 일원이 되어 세계에 우뚝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 생각하면 미칠 듯 즐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앞으로 훌륭한 국가를 이룩하여 문화의 높은 탑을 쌓는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뿐이지 된다는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때까지보다도 한층 마음을 도사려 삼천만 동포에 한 사람의 빠짐도 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부지런히 공부해야겠습니다.
이때까지는 우리가 남의 배를 타고 있은 셈이니 낮잠을 자도 좋고 흥떵거려도 좋았겠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 배를 타고 우리가 키를 잡고 망망한 대양을 건너가야 하니 한눈팔아서는 못쓰고 만일 흥떵거린다면 큰일입니다. 우리가 한 수 잘못해서 파선해 버리고 다시 남의 배를 타게 되는 신세가 된다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칠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제 역사적으로 중대한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천만년 조선의 운명이 우리의 두 어깨에 지워졌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성과 모든 힘을 기울여 이 대업을 완성해야겠습니다. 그리함에는 공연히 좋다고 날뛰는 일 없이 제각기 제가 맡은 직책에 최선의 심혈을 경주하고 한시라도 자기완성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질없이 정치계에 분주(奔走)하지 말고 자기 역량의 함양에 모든 정신을 기울여야 합니다. 조선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질적 향상이 조선의 질적 향상의 유일한 길이고 그래야만 조선의 앞날에 광명이 비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까딱 잘못하면 만년대계를 그르칩니다. 천추만대의 자자손손에게 우리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에 일본의 채찍으로 움직인 우리가 아닙니까. 그 채찍이 물러난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만일 남의 채찍이 있었으니까 부지런했고 오늘은 그것이 없으니 게으른다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조선 민족의 수치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내 자신의 마음속에 그러한 점으로 접히는 일이나 없을까.
이러한 반성을, 나는 일본 시대보다 더 부지런한가 더 성실한가 하는 반성을 누구나 하루에 세 번씩 하기로 합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다 그러하고 가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러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낮이면 제각기 부지런히 일하고 밤이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이 모두 머리를 모아서 가갸거겨를 외이고 그 대문을 넘어선 사람들은 다시 진정한 조선사람이 되기 위하여 모든 조선학의 수련에 힘쓰고 그리고 이러한 모든 노력이 일본의 채찍으로 움직일 때보다 몇 배나 더한가 항상 마음속에 가늠해보고 이러하면 조선의 앞날엔 우리들과 및 우리들의 자손에겐 무궁한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유학생과의 문답. 농민조합의 나갈 길 공산당이 외치는 8시간 노동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