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초' 첫눈에 반해야 산다…컬리·당근 로고의 비밀 [비크닉]

첫인상을 결정하는 시간 0.017초
 
미국 다트머스대학 심리·뇌 과학자 폴 왈렌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상대방에 호감과 신뢰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0.017초가 걸린다고 해요. 뇌의 편도체가 빠른 시간 안에 상대방을 파악하도록 진화한 것이라는데요. 이는 소비자의 첫눈에 들어야 살아남는 브랜드에게도 중요한 요소일 겁니다. 비슷비슷한 제품이 함께 있는 대형 마트는 물론이고 손가락 터치 몇 번이면 되는 온라인 쇼핑에서는 더더욱 말이죠. 그렇다면 요즘 가장 많이 선택받는 브랜드의 얼굴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2019년 컬리 BI 리브랜딩. 로고는 가독성을 높이고 기존 보라색은 명시성을 개선했다. 배송 박스는 상온·냉장·냉동으로 구분해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게 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2019년 컬리 BI 리브랜딩. 로고는 가독성을 높이고 기존 보라색은 명시성을 개선했다. 배송 박스는 상온·냉장·냉동으로 구분해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게 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컬리·당근·예스24·뚜레르·칠성사이다·티빙·SM엔터테인먼트까지…. 이름을 듣는 순간 컬러와 서체가 생각나는 이 브랜드들의 ‘얼굴’을 담당한 ‘CFC(씨에프씨)’도 0.017초의 마력을 누구보다 잘 꿰뚫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업력 13년 차에 접어든 CFC는 브랜드가 가진 철학과 정체성을 내재화하고 그것을 고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맥락 있는 디자인’으로 승부를 봤다고 해요. 대체 사람들을 사로잡는 ‘한끗 다른’ 디자인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서울 성산동 CFC 사옥에서 전채리 대표를 만났습니다.

2013년 CFC를 세운 전채리 대표. CFC는 Content(콘텐트) Form(형태) Context(맥락)의 약자로 미국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폴 랜드의 ‘디자인은 형태와 내용 간의 흐름이다’의 말에서 착안했다.

2013년 CFC를 세운 전채리 대표. CFC는 Content(콘텐트) Form(형태) Context(맥락)의 약자로 미국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폴 랜드의 ‘디자인은 형태와 내용 간의 흐름이다’의 말에서 착안했다.

 

“브랜딩이란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

 
ㅡ브랜딩 디자인이라고 하면, 로고를 만드는 정도로 생각하게 대부분이죠. CFC가 보여주는 디자인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쉽게 얘기하면 그 ‘브랜드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이에요. 브랜드 디자인도 시각 세계에 있어 부재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구축해 나가는 일이거든요. 로고든 비주얼 시스템이든 이면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살펴보는 것이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됩니다.

리브랜딩 작업을 하다 보면 ‘기존 로고는 왜 이런 모양인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브랜드 구성원들의 의견을 입체감 있게 수렴하고 공감을 얻는 일이 그래서 중요해요. ‘그냥 위에서 이렇게 정했대’하는 상태가 되면 안 되는 거죠. 내부 사람에게 브랜드 본질이 내재화된 상태여야 외부 커뮤니케이션이 한 목소리로 나갈 수 있거든요.


세탁서비스 런드리고는 세탁이라는 업의 본질과 실용성을 담은 모습으로 재단장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세탁서비스 런드리고는 세탁이라는 업의 본질과 실용성을 담은 모습으로 재단장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내러티브가 갖춰지면 ‘베이식 시스템’을 설계합니다. 슈프림을 입는 사람인지 르메르를 입는 사람인지에 따라 스타일과 언어, 행동 등이 다른 것처럼 브랜드의 개성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고 보일지 만드는 일이죠. 이후엔 앱 아이콘이나 웹사이트 화면, 제품 패키지, 명함 등에 로고와 그래픽을 매체에 맞게 적용하는 일이 우리의 역할이죠.”

ㅡCFC가 이 분야에서 전문이 된 비결이 있나요.
“클라이언트가 ‘아 여기는 좀 재미있게 해결책을 제시하는구나’하고 봐주신 게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컬리나 당근처럼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시각 자산을 잘 계승하면서 신선함을 더하는 방식의 리브랜딩도 있고, 런드리고나 리멤버처럼 변화의 폭이 큰 경우도 있거든요. 브랜드의 방향성에 따라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던 것이 주효했어요. 또 가끔 듣는 칭찬이 ‘그래도 CFC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네요’예요.(웃음) 프로젝트가 난항을 겪더라도 한 팀이니까 끝까지 책임지고 간다는 마음이 있죠.”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업의 본질에 정답 있다

문화콘텐츠 플랫폼으로 확장한 예스24는 기존 스마일과 파란 컬러 요소를 유지하면서 '라이프 모티베이터'라는 새로운 비전과 의지를 담아냈다. 기존 유저들에게서 '잘 바꾼 리브랜딩'이라는 호응을 이끌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문화콘텐츠 플랫폼으로 확장한 예스24는 기존 스마일과 파란 컬러 요소를 유지하면서 '라이프 모티베이터'라는 새로운 비전과 의지를 담아냈다. 기존 유저들에게서 '잘 바꾼 리브랜딩'이라는 호응을 이끌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문화콘텐츠 플랫폼으로 확장한 예스24는 기존 스마일과 파란 컬러 요소를 유지하면서 '라이프 모티베이터'라는 새로운 비전과 의지를 담아냈다. 기존 유저들에게서 '잘 바꾼 리브랜딩'이라는 호응을 이끌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문화콘텐츠 플랫폼으로 확장한 예스24는 기존 스마일과 파란 컬러 요소를 유지하면서 '라이프 모티베이터'라는 새로운 비전과 의지를 담아냈다. 기존 유저들에게서 '잘 바꾼 리브랜딩'이라는 호응을 이끌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ㅡ처음 브랜드를 수립하는 프로젝트와 기존에 잘 알려진 브랜드를 리브랜딩하는 경우 접근법이 다를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브랜드의 시각적 레거시(유산)의 유무인 것 같아요. 기존 브랜드의 시각적 자산을 출발점으로 변화의 폭을 살피며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하는 것이 리브랜딩의 핵심이라면 신규 브랜딩은 언어로 존재하는 브랜드의 철학을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해석해 실체화하는 것이 핵심이죠. 무한하게 상상할 수 있기에 무척 재미있는 대신 제약이 없기 때문에 어렵기도 해요.”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로 포지셔닝한 당근의 새로운 BI. CFC 제공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로 포지셔닝한 당근의 새로운 BI. CFC 제공

 
ㅡ당근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브랜드의 새로운 얼굴을 만드는 일은 어땠나요.
“10대부터 80대까지 전 국민이 쓰는 앱이다 보니 변화의 폭이 크진 않았어요. 사람들이 앱 아이콘을 보고 0.1초 만에 당근임을 인지할 수 없으면 안 되니까요. 마침 브랜드는 당근 마켓에서 ‘마켓’을 떼고 동네 생활 커뮤니티로 포지셔닝을 확장하던 시점이었거든요. 동네에 대한 애정이 피어나는 콘셉트로 당근의 몸통인 ‘핀’ 형태는 지키되 이파리 부분을 비정형적인 하트의 모습으로 만들었어요. ‘익숙하면서도 새로움’을 주는 것이 리브랜딩의 관건인데 얼마큼 변화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지 적정선을 찾아 나가는 걸 지속해서 테스트하고 있어요. 컬리도 리브랜딩했을 때 고객들은 거의 몰랐다고 해요. 좋은 쪽으로 변화하면 첫째 날은 ‘어, 뭔가 다른데?’ 하고 둘째 날부터는 예전 것이 생각나지 않는 거죠.”

직장인 필수앱으로 성장한 리멤버는 '기회가 열린다'는 슬로건처럼 성공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표현했다. CFC 제공

직장인 필수앱으로 성장한 리멤버는 '기회가 열린다'는 슬로건처럼 성공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표현했다. CFC 제공

 
ㅡ보이지 않는 가치를 디자인하는 방법은.
“플랫폼 브랜드의 가장 중요한 고객 접점은 앱이에요. 앱의 핵심 특징을 정리하다 보면 브랜드의 강점과 존재 이유, 나아가 업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게 돼요. 이런 것들을 분석하다 보면 흩어져 있던 강점들이 묶이는 지점이 생깁니다. 리멤버의 경우 명함 관리 서비스로 시작해 지금은 커리어 커뮤니티나 채용까지 가능한 직장인 필수 앱으로 자리 잡았는데요. 저는 명함을 주고받는 아날로그적인 행동이 플랫폼 비즈니스가 된다는 지점이 재미있었어요. 리멤버의 슬로건이 ‘기회는 열린다’거든요. 멈춰 있지 않고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성장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명함의 고유한 직사각형 형태를 평행사변형처럼 ‘R’ 안에 구성해 열려 있는 순간을 표현했어요. 이런 식으로 업의 본질과 브랜드가 원래 갖고 있던 조형적인 단서들을 연결해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거죠.”

1992년 출시한 백세주는 '백년을 잇는 향기'를 컨셉으로 과거와 현대를 잇는 세련된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1992년 출시한 백세주는 '백년을 잇는 향기'를 컨셉으로 과거와 현대를 잇는 세련된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ㅡ백세주 리브랜딩은 지난해 ‘코리아디자인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브랜드 부문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됐어요.
“인지도 있는 브랜드지만 대폭 변화를 줬던 사례인데요. 원래 투명한 병에 담겼지만 제품의 퀄리티를 위해 빛의 영향을 차단하는 갈색 병을 도입하자는 것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어요. 국순당 회장·대표님과 회의를 해보니 백세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고 큰 변화로 매출이 하락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주질을 위해 갈색 병으로 바꾼다는 결정에서 장인의 면모가 보였죠. 강원도 양조장을 가보니 윤형근·이배 작가의 단색화가 떠오르는 산세가 인상적이었어요. 백세주가 32년간 올곧게 이어온 정신을 담아보자는 뜻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결과물이 완성되었습니다.”

‘시대의 미의식’을 만든다 

롯데백화점 프리미엄 식료품관인 레피세리는 황금기를 모티프로 풍요로웠던 벨 에포크 시대의 아르누보 양식을 적용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롯데백화점 프리미엄 식료품관인 레피세리는 황금기를 모티프로 풍요로웠던 벨 에포크 시대의 아르누보 양식을 적용했다. 사진 홍기웅·CFC 제공

 
ㅡ‘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기업의 만족도를 충족시키면서도 기시감 들지 않는 디자인을 만드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디자인 사이트나 SNS에서 영감을 얻기보다 백세주처럼 원천 콘텐트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해요.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바뀌는 트렌드를 우리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유행하는 언어들을 양념처럼 적용하려고 합니다. 본질로 설계 하되 지금 시대에서 이야기되는 것들과의 균형을 잡아나가는 거죠.”

ㅡ제품이나 서비스뿐만 아니라 국가나 지자체도 브랜딩을 하는 요즘입니다. CFC의 손길이 닿은 분야도 꽤 넓어요.
“회사 초창기에는 뷰티 브랜드 작업을 많이 했고 이후 케이팝 시장과 연결된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가 많았어요. 코로나 시기에 플랫폼 비즈니스가 확장했고 이후엔 다시 리테일 브랜딩이 주요해졌어요. 우리는 단순히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브랜드가 한 시대에 있는 만큼, 나중에 돌이켜 본다면 디자이너 역시 한 시대의 미의식을 만들어 나가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1950년 출시된 칠성사이다의 로고 변천사는 당대 디자인을 읽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24년 만에 'Sense of Joy'를 주제로 리브랜딩한 모습. 사진 홍기웅·CFC 제공

1950년 출시된 칠성사이다의 로고 변천사는 당대 디자인을 읽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24년 만에 'Sense of Joy'를 주제로 리브랜딩한 모습. 사진 홍기웅·CFC 제공

 
ㅡ대표님이 생각하는 좋은 브랜드는 무엇인가요.
“자기만의 철학과 신념이 있는 사람, 시간이 지나도 꾸준하고 한결같은 사람을 보통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잖아요. 여기서 ‘자기다움’이란 결국 내면과 외면이 연결되어 일치화된 걸 의미하지 않나 싶어요. 브랜드도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철학과 존재 이유를 지닌 상태에서 꾸준히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좋은 브랜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