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영화에 10대 관객도 몰렸다…재개봉 열풍의 비밀

극장가 휩쓴 옛 영화들 

재개봉 영화의 열풍이 지난해에 이어 계속되고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각각 재개봉한 판타지 영화 ‘더 폴’과 로맨스 영화 ‘러브레터’가 모두 10만 관객을 넘어섰다. 특히 ‘더 폴’의 경우,  2008년 최초 개봉에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재개봉에서는 4배 많은 관객을 모았다. 이에 힘입어 감독인 타셈(본명 타셈 싱)이 지난 주 처음으로 내한하기도 했다. 재개봉 관객 수가 최초 관객 수를 뛰어넘은 기현상은 지난해 로맨스 영화 ‘남은 인생 10년’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모든 재개봉 영화가 이렇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재개봉 영화에는 어떤 비결이 숨겨져 있을까. 또한 재개봉 영화의 인기는 신작 영화 시장 침체의 어두운 방증일까, 아니면 새로워진 영화 감상의 트렌드일까.  

최근 재개봉해 상영 중인 영화들. 첫 개봉 때의 4배에 달하는 관객을 모은 판타지 영화 ‘더 폴’(2006). CG 없이 그림 같은 화면을 연출했다.

최근 재개봉해 상영 중인 영화들. 첫 개봉 때의 4배에 달하는 관객을 모은 판타지 영화 ‘더 폴’(2006). CG 없이 그림 같은 화면을 연출했다.

지난 12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일일 박스오피스를 보면, 20위 안에 든 영화들 중 6개가 재개봉 영화다. 이날 재개봉한 ‘미드나잇 인 파리’(2011), ‘500일의 썸머’(2009), ‘원더’(2017)는 이미 과거 한두 차례 재개봉 했음에도 또 다시 순위권에 올랐다. 또 지난 연말부터 ‘재개봉의 기적’으로 떠오른 ‘더 폴: 디렉터스컷’(2006)은 이날 누적 관객 수가 12만4000여 명에 이르렀다. (괄호 안은 모두 제작 연도)

지난 5일 재개봉한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와 지난 달 27일 재개봉한 ‘죽은 시인의 사회’(1989)도 20위권 내에 자리를 지켰다. 지난달 1일 재개봉한 ‘러브레터’(1995)는 20위 밖으로 밀려났지만, 7번째 재개봉(통합전산망 기준)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개봉 기간 관객 수만 10만 명을 넘는 기염을 토했다.

젊은 관객은 대부분 ‘첫 개봉’ 인식

첫 개봉 때의 4배에 달하는 관객을 모은 판타지 영화 ‘더 폴’(2006). CG 없이 그림 같은 화면을 연출했다.

첫 개봉 때의 4배에 달하는 관객을 모은 판타지 영화 ‘더 폴’(2006). CG 없이 그림 같은 화면을 연출했다.

지난해와 올해의 재개봉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감독의 작가주의(auteurism)가 돋보이는 예술성 짙은 영화들이다. 최근 타계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비롯해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와 타셈 감독의 ‘더 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그룹은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나 ‘펑펑 울게 하는 영화’로 소문 난 드라마·로맨스 영화다. ‘러브레터’ ‘죽은 시인의 사회’ ‘원더’ ‘500일의 썸머’가 이 그룹에 속한다. 지난해 재개봉 영화 1~5위를 차지한 ‘남은 인생 10년’(2022), ‘비긴 어게인’(2013), ‘소년시절의 너’(2019), ‘노트북’(2004), ‘쇼생크 탈출’(1994)도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파리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예술 거장들을 만나는 ‘미드나잇 인 파리’(2011).

1920년대 파리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예술 거장들을 만나는 ‘미드나잇 인 파리’(2011).

그렇다고 모든 재개봉 영화들의 성적이 좋은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전설적인 록밴드 도어즈(The Doors)와 그 리드 보컬리스트 짐 모리슨의 삶과 요절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93년 영화 ‘도어즈’가 지난 23일 개봉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보다 앞서 개봉했고 스크린 수와 상영 횟수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누적 관객 수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2500여 명에 머물고 있다. 이런 흥행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재개봉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첫째 조건은 확실한 팬덤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 떠오르는 팬덤인가 아니면 그저 추억에 기댄 팬덤인가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보면 ‘도어즈’의 부진을 이해할 수 있다. 밴드 도어즈 자체가 한국에서는 비틀즈, 퀸 같은 밴드에 비교해 팬이 훨씬 적다. 스톤 감독의 팬들도 그의 전성기였던 1980~9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던 층에 머물러 있고 젊은 세대는 그를 잘 모른다.

한국에 ‘카르페 디엠’이란 말을 유행시킨 ‘죽은 시인의 사회’(1989).

한국에 ‘카르페 디엠’이란 말을 유행시킨 ‘죽은 시인의 사회’(1989).

반면 “새롭게 떠오른 팬덤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바로 ‘더 폴’이다. 이 영화를 재개봉한 수입배급사 오드의 김시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첫 개봉’으로 인식합니다. 그만큼 젊은 관객이 많아요. (‘더 폴’을 단독 개봉한 멀티플렉스 CGV 통계에 따르면 관객의 70%가 2030 세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데 엄마와 함께 와서 보니 정말 좋았다’라는 10대 관객도 있었습니다.”

록 밴드 ‘도어즈’와 리드 보컬 짐 모리슨의 일대기를 다룬 ‘도어즈’(1993).

록 밴드 ‘도어즈’와 리드 보컬 짐 모리슨의 일대기를 다룬 ‘도어즈’(1993).

타셈 감독은 4일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인터넷 덕분에 이 영화가 새 생명을 얻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종류는 아니고, 나도 그런 마인드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더 폴’을 접하고 다시 개봉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그룹이 생겼는데 나는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를 하지 않아서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토론토 영화제에 갔을 때 평론가들이 ‘왜 이 영화를 다시 내놓지 않느냐’고 계속 묻더군요. ‘20년 전에 내가 이 영화를 팔려고 애쓸 때는 대체 어디 계셨냐’고 물었더니 ‘그땐 10살이었다’라고 하더군요.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가 이 영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더 폴’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절망에 빠진 젊은 스턴트맨이 병원에서 만난 어린 소녀에게 즉석에서 지어낸 환상 이야기를 들려주며 현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내용이다. 타셈 감독은 이야기 속 환상적인 장면들을 위해 수년에 걸쳐 전세계 24개국에서 가장 독특한 풍경을 찾아 컴퓨터그래픽(CG) 없이 촬영했다. 그러나 여러 평론가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2008년 개봉 당시 세계적으로 흥행에 참패했고 국내에서도 관객은 2만8000여 명에 그쳤다. 그러다 최근 반전이 일어난 것에 김 대표는 “CG로 점철된 판타지 영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아날로그 장인 정신에 신선함을 느꼈을 것이고, 또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영화를 접하면서 큰 화면에서 보고 싶다는 욕망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타계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사진 iMDb]

최근 타계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사진 iMDb]

이어서 김 대표는 “‘더 폴’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라면서 “대개는 지난해 3번째 재개봉한 ‘노트북’처럼 처음부터 성공해서 큰 팬덤을 구축한 영화들이 재개봉 때에도 상영관과 횟수를 큰 규모로 시작해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또한 ‘더 폴’의 경우는 “관객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정보를 모아 깊이 있게 공부를 하고 극장에 오는 경우가 많다”며 “그래서 홍보를 할 때도 관객을 가르치듯 홍보하거나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종합해 보면, 성공하는 재개봉 영화들은 강력한 팬덤이 있으며 그 팬덤은 대개 첫 개봉부터 형성된다. 그러나 ‘더 폴’처럼 첫 개봉에서는 실패했음에도 팬덤이 점진적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형성되는 예외가 있는데, 특히 ‘더 폴’은 OTT시대에도 관객을 집에서 영화관으로 끌어낼 수 있는 스펙터클한 영상의 영화이기에 재개봉 반응이 폭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판·음원 마케팅 병행, 인기 끌기도
정덕현 평론가는 재개봉 영화 흥행의 둘째 조건으로 “팬덤이 영화관으로 집결하게 만들 이슈”를 꼽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경우, 2016년 영국 BBC방송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편’ 중 1위를 차지하는 등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일반 관객에게는 난해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그럼에도 감독인 데이비드 린치가 지난달 78세의 나이로 타계하면서 영화 재개봉이 화제를 모았고 적은 스크린 수에 비해 선전하고 있다.

2024년 재개봉 영화 흥행 순위

2024년 재개봉 영화 흥행 순위

또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개봉 당시부터 큰 인기를 누려왔고 수 차례 재개봉을 해왔지만, 지난 12월 주연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54세의 이른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이번 재개봉이 더 큰 화제를 모았다. 영화의 명대사 “오겡끼데스까(잘 지내나요)”를 인터넷 밈이나 쇼츠 영상으로만 접해왔던 1020 세대까지 극장에 모여들어 “새로운 세대의 팬덤”까지 추가로 구축했다. ‘러브레터’를 단독 개봉한 메가박스의 관객 데이터에 따르면, 최다 관람층은 20대로 35%를 차지한다.

“여기에 재개봉 영화를 새로운 세대의 눈에 맞추려는 마케팅도 중요하다”고 정 평론가는 설명했다.

재개봉 마케팅이 특히 빛났던 사례는 지난해 독립·예술영화 흥행 2위를 차지한 일본 영화 ‘남은 인생 10년’이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난치병으로 앞으로 10년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여성이 삶의 의지가 없는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2023년 개봉된 후 불과 1년 만에 재개봉해서 처음보다 3배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재개봉을 감행한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동명의 원작 소설을 띄우고 싱어송라이터 십센치(10cm) 등이 참여한 콜라보 음원을 발매하는 등 출판과 음악 마케팅까지 병행해서 1020 팬들을 끌어모은 결과다. 바이포엠스튜디오의 한상일 이사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수시로 온라인상의 트렌드를 체크하면서 이 영화가 “소셜미디어에서 회자되는 빈도수와 배우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런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런 재개봉 영화들의 흥행은 “아무리 투자를 많이 한 작품이라도 신규 영화가 극장에서 사람을 끌어모으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정 평론가는 평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비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영화 산업을 극장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OTT를 포함한 변화된 환경에서 넓게 보느냐의 문제다. 소비자들이 이미 예전과 달리 극장에 가는 것이 일상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OTT 환경에서 사람들은 최신작에만 쏠리기보다 최근 이슈에 관련된 과거 명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콘텐츠를 찾아보는 경우가 늘었다. 영화계는 이런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