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즐기는 게 진짜 ‘힙’이죠...MZ 사로잡는 'K트레디션’

지난달 30일 '마당놀이 모듬전'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극장으로 120개의 다과세트와 아이스티가 도착했다. 국립창극단 배우 팬카페 '준수한소리' 회원 50여 명이 약 200만원을 자발적으로 모금해 만든 '서포트' 회비로 마당놀이 공연에 출연하는 김준수 배우와 스탭들에게 선물을 전달한 것. '서포트'란 팬들이 돈을 모아 옥외 광고를 싣거나 스타에게 생일 선물, 커피차 등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준수한소리' 회원들은 지난해 12월 국가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 황해봉이 만든 태사혜(전통 갓신)과 한복 디자이너 이진희가 맞춤 제작한 두루마기를 김준수의 생일 선물로 전달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7일 국립창극단 배우 김준수가 돈화문 국악당에서 팬클럽 회원들이 선물한 두루마기를 입고 판소리 '수궁가'를 완창하는 모습. 사진 김준수 인스타그램

지난해 12월 7일 국립창극단 배우 김준수가 돈화문 국악당에서 팬클럽 회원들이 선물한 두루마기를 입고 판소리 '수궁가'를 완창하는 모습. 사진 김준수 인스타그램

 
국립창극단 김수인 배우의 팬카페 '수인노정기' 회원 이정연(30)씨는 지난해 9월 13일 김수인 배우의 생일에 맞춰 마포구 연남동의 한 카페를 3일 동안 빌려 '생일 카페'로 꾸몄다. 생일 카페는 스타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팬들이 자발적으로 공간을 대관해 오픈하는 일일 카페. 이씨는 "다른 팬들과 김수인 배우에게 특별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정연(30)씨가 지난해 9월 13일 국립창극단 김수인 배우의 생일을 맞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3일 동안 오픈한 생일 카페 '청산'의 홍보 현수막. 사진 이정연

이정연(30)씨가 지난해 9월 13일 국립창극단 김수인 배우의 생일을 맞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3일 동안 오픈한 생일 카페 '청산'의 홍보 현수막. 사진 이정연

지난해 9월 국립창극단 배우 김수인이 직접 생일카페 '청산'을 찾아 팬들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모습. 사진 이정연

지난해 9월 국립창극단 배우 김수인이 직접 생일카페 '청산'을 찾아 팬들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모습. 사진 이정연

김수인 생일 카페 '청산'의 내부는 이정연씨가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며졌다. 사진 이정연

김수인 생일 카페 '청산'의 내부는 이정연씨가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며졌다. 사진 이정연

 
지난 6일 저녁 전통 음악극 '광대'가 열리고 있는 국립정동극장에서 만난 김은남(30)씨는 공연을 기다리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드라마 '정년이'에도 새타령이 나오지만, 현장에서 듣는 건 차원이 다르다"면서다. 이날 공연이 김씨의 광대 '자둘'(두 번째 관람)이다. 평소 전통 예술 공연을 관람을 즐긴다는 그는 "2022년 뮤지컬 서편제로 판소리를 좋아하게 됐고 그 후로 소리에 관심이 생겨 국립창극단에 '입덕'했다"며 '광대' 공연 중 "화관무, 아박무 등 춤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1950년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 최고의 국극배우가 되기 위한 '타고난 소리' 정년이의 경쟁과 연대 등 성장 서사를 그린다. 사진 tvN

1950년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 최고의 국극배우가 되기 위한 '타고난 소리' 정년이의 경쟁과 연대 등 성장 서사를 그린다. 사진 tvN

'광대'는 100년 동안 지박령으로 극장을 지키다 후배 광대 앞에 나타난 선배 '백년광대'들의 이야기. 신구의 조화를 주제로 한 이 공연처럼, 이날 모인 관객의 성별과 나이대도 다양했다. 평일 저녁임에도 아이 손을 잡고 온 가족 단위 관객은 물론, 친구나 연인과 함께 온 2030 관객이 눈에 띄게 많았다.

지난 6일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전통 음악극 '광대' 공연에 앞서 관객들이 캐스팅보드를 살펴보고 있다. 최혜리 기자

지난 6일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전통 음악극 '광대' 공연에 앞서 관객들이 캐스팅보드를 살펴보고 있다. 최혜리 기자

지난해 가을 방영된 무용수 경연 프로그램 '스테이지파이터'에서는 한국무용 전공자 최호종이 발레·현대무용 무용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스테이지파이터 참가 무용수들의 전국 투어 갈라쇼는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됐다. 사진 김효준 인스타그램

지난해 가을 방영된 무용수 경연 프로그램 '스테이지파이터'에서는 한국무용 전공자 최호종이 발레·현대무용 무용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스테이지파이터 참가 무용수들의 전국 투어 갈라쇼는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됐다. 사진 김효준 인스타그램

 
최근 국악·창극·한국무용 등 전통 예술 공연을 이끄는 것은 MZ의 티켓 파워다. 국립창극단이 지난해 공연을 올린 7개 작품의 객석 평균 점유율은 93%. 2010년대 초반 10% 남짓이었던 창극단의 2030 관객 비율은 꾸준히 우상향해 2024년에는 30%에 이르렀다. 


특히 국립창극단은 아이돌 못지않은 강성 팬덤을 자랑한다. 전회차 '회전문'(재관람)을 도는 고정 관객이 있을 정도다. 공연 때마다 팬클럽의 커피차 '조공'을 받는 김준수·김수인 등 스타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는 날이면 아이돌 팬미팅처럼 '대포 카메라'를 든 팬들이 해오름 극장 로비에 진을 친다. 한 국립극장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창극단 공연 캐스팅 발표가 늦어지자 국민신문고에 항의가 올라오는 일도 있었다"며 "창극 '리어'의 영어 자막 중 띄어쓰기가 틀리거나 대문자 소문자 표기가 뒤바뀐 부분을 일일이 찾아 바꿔 달라고 건의한 팬도 있다"고 했다. 

지난해 7월 26일 국립창극단 김준수 배우의 팬들이 '창(唱):꿈꾸다' 공연을 응원하며 커피차를 보냈다. 사진 국립극장

지난해 7월 26일 국립창극단 김준수 배우의 팬들이 '창(唱):꿈꾸다' 공연을 응원하며 커피차를 보냈다. 사진 국립극장

지난해 5월 국립창극단 김수인 배우의 팬카페 '수인노정기' 회원들이 김수인(오른쪽)·조유아 배우의 '절창Ⅳ' 공연을 응원하는 커피차를 보냈다. 사진 국립극장

지난해 5월 국립창극단 김수인 배우의 팬카페 '수인노정기' 회원들이 김수인(오른쪽)·조유아 배우의 '절창Ⅳ' 공연을 응원하는 커피차를 보냈다. 사진 국립극장

 
MZ 세대에서 한국 전통문화가 '힙'하게 받아들여지는 '힙트레디션' 열풍은 극장 통계로도 감지된다. 지난해 11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게임 음악 콘서트 '음악 오디세이 천하제일상'의 2030 예매율은 80%에 육박했다. 사전 예매를 완판한 후 현장에서 추가 입장을 받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야외 콘서트 '애주가' 공연(지난해 6월) 예매자 중 44%가 2030이었다. 인기 장르도 다양해졌다. 2030% 예매 비율이 높았던 인기 공연 중에는 창극뿐 아닌 무용, 기악 공연이 두루 섞여 있다. 정선영 국립극장 피디는 "연극·뮤지컬과 장르적으로 유사한 창극으로 입문해 정통 판소리나 한국무용 공연 관람으로 이어지는 예매 패턴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창극단에 비해 전통적인 국악 공연을 주로 선보이는 국립국악원 공연에도 젊은 층의 관심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국립국악원이 지난해 9월 선보인 소리극 '왔소! 배뱅'은 30대 관객 비율이 전체 50%에 육박하며 예매 오픈 이틀 만에 전석이 매진됐다. '왔소! 배뱅'은 국가무형유산인 '배뱅이굿'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들이 배역을 나눠 창극 형식으로 꾸민 작품. 인기에 힘입어 지난 12일부터 16일까지 연 5회의 앵콜 공연도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국립국악원이 지난해 9월 선보인 소리극 ‘왔소! 배뱅’은 30대 관객 비율이 전체 50%에 육박하며 예매 오픈 이틀 만에 전석이 매진됐다. ‘왔소! 배뱅’은 국가무형유산인 ‘배뱅이굿’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들이 배역을 나눠 창극 형식으로 꾸민 작품이다. 사진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원이 지난해 9월 선보인 소리극 ‘왔소! 배뱅’은 30대 관객 비율이 전체 50%에 육박하며 예매 오픈 이틀 만에 전석이 매진됐다. ‘왔소! 배뱅’은 국가무형유산인 ‘배뱅이굿’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들이 배역을 나눠 창극 형식으로 꾸민 작품이다. 사진 국립국악원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힙트레디션' 열풍에는 한국 문화에 쏠리는 세계인의 관심으로 인해 촉발된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 K팝의 근원으로 판소리 등의 한국 전통 음악을 재조명하는 움직임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미디어를 통해 전통예술이 세련되게 노출되면서 '독특한 취향'을 추구하는 젊은층의 트렌드와 맞아떨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립국악원 이승재 관객개발팀장은 “전통을 즐기는 것이 요즘 2030들에게는 '나만 아는 멋'으로 어필하는 분위기"라며 "요즘 국악공연에는 혼자 온 젊은 관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타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관객들에게 다가가려는 전통문화계의 노력도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지난해 6월 초연한 국립창극단 신작 '만신: 페이퍼 샤먼'은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을 연출 겸 음악감독으로 스카웃해 만든 작품이다. 지난해 5월 오픈 1분 만에 매진된 김준수 콘서트 '창(唱) : 꿈꾸다'는 전통 판소리로 시작해 발라드, 록 반주에 어우러지는 창까지 장르를 허무는 음악으로 90분을 채웠다. 중극장에서 대극장으로 옮겨 2023년 11월 삼연한 창극 패왕별희는 의상·분장·안무 등 시각적인 측면에서는 경극의 매력을 살렸고 소리와 대사, 음악은 창극의 문법을 썼다.

2024년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찍고 옹녀' 공연 사진. 사진 국립창극단

2024년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찍고 옹녀' 공연 사진. 사진 국립창극단

 

이날치 밴드. 사진 하이크

이날치 밴드. 사진 하이크

가수들의 성공 공식도 비슷하다. 수궁가를 모티브로 한 히트곡 '범 내려온다'를 만든 이날치 밴드는 전통 판소리에서의 고수의 북장단을 베이스와 드럼으로 대체했다. 업로드 4주 차에 조회 수 500만회를 넘긴 '국악 소녀' 송소희의 자작곡 'not a dream'은 민요풍의 보컬에 밴드 연주가 어우러진다. 여기에 소리꾼 경연 프로그램 '풍류대장',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정년이', 무용수 경연대회 '스테이지파이터'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며 전통문화 콘텐트가 빛을 보게 됐다는 것. 실제 드라마 '정년이'(tvN)는 시청률 16.5%로 종영하며 여성국극 열풍을 일으켰다. 무용수 경연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Mnet) 최종 우승을 발레, 현대무용 전공자를 제치고 한국 무용 전공자가 차지하며 한국 무용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도 했다. 

 

지난해 8~9월 공연돼 큰 화제를 모은 국립무용단 '행플러스마이너스' 포스터 사진. 전통 한국무용(왼쪽)과 장르 경계를 허무는 현대적 스타일의 한국 무용을 동시에 선보였다. 사진 국립무용단

지난해 8~9월 공연돼 큰 화제를 모은 국립무용단 '행플러스마이너스' 포스터 사진. 전통 한국무용(왼쪽)과 장르 경계를 허무는 현대적 스타일의 한국 무용을 동시에 선보였다. 사진 국립무용단

다만 '창극', '한국무용', '국악관현악' 같은 장르 팬덤보다 소수 스타를 중심으로 한 인물 팬덤에 그친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김도헌 음악평론가는 "아직 국악은 엘리트 음악, 전공자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미디어와 이름이 알려진 스타의 작품에 기대 국악을 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현대 음악 장르와 적극적으로 융합해 친근하고 익숙하다는 느낌 줄 수 있도록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