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훔친 장물…조선 형법 자료 '대명률' 보물 지정 취소된다

 

2016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도난당한 장물임이 드러나 보물 지정 취소되는 ‘대명률’(大明律). 사진 국가유산청

2016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도난당한 장물임이 드러나 보물 지정 취소되는 ‘대명률’(大明律). 사진 국가유산청

보물로 지정됐다가 도난당한 장물임이 드러나 논란이 됐던 ‘대명률’(大明律)이 보물에서 제외된다. 국보·보물과 같은 국가지정유산이 가치 판정이 바뀌면서 해제된 사례는 있어도 지정 자체가 취소되는 건 처음이다.

11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최근 열린 문화유산위원회 산하 동산문화유산 분과 회의에서 보물 ‘대명률’의 행정처분(지정) 취소 계획이 가결됐다. 이를 관보에 게재하고 30일 이내 별다른 이의제기가 없으면 ‘대명률’은 지난 2016년 지정 후 9년 만에 보물 자격을 잃게 된다. 

목판본 고서인 ‘대명률’은 중국 명나라의 형법전으로 조선 시대 형법의 근간이 된 중요 자료다. 보물로 지정됐던 판본은 1373년 초간본을 수정 편찬해 1389년 명나라에서 간행한 것으로 국내외에 전해지는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영천에서 사설 박물관을 운영하는 A씨가 경상북도(영천시)를 통해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에 보물 지정 신청을 했을 때도 이 같은 가치가 인정됐다. 당시 A씨는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정 4개월여 만에 보물 ‘대명률’은 논란에 휩싸였다. 2016년 11월 경찰이 문화재 특별단속 결과로 관련 사범 48명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이 고서가 ‘장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 결과 A씨는 2012년 장물을 취급하는 B씨에게서 1500만원을 주고 ‘대명률’을 샀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1000만원을 더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보물 지정 후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자 B씨는 경찰 수사에 협조해 ‘대명률’이 장물임을 폭로했다. A씨는 2022년 대법원 판결에서 문화재보호법(현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실형이 확정됐다.


2016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도난당한 장물임이 드러나 보물 지정 취소되는 ‘대명률’(大明律)의 내지 첫장. 사진 국가유산청

2016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도난당한 장물임이 드러나 보물 지정 취소되는 ‘대명률’(大明律)의 내지 첫장. 사진 국가유산청

문제의 ‘대명률’은 문화 류씨 집안이 1878년 경북 경주에 세운 서당인 육신당에 보관돼 왔다. 육신당 측은 1998년 무렵 건물 현판과 ‘대명률’을 포함한 고서 등 총 81건 235점의 유물이 사라졌다고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했다. 이어 2011년엔 국가유산청에도 도난 신고를 했다.  

하지만 국가유산청은 보물 지정을 위해 관계전문가 조사를 했을 때 이것이 도난당한 ‘대명률’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고서의 경우 판본이 같은 책자가 여럿 있을 수 있기에 지정 당시엔 또 다른 책자로 판단한 듯하다”며 “애초 소유자가 도난신고 때 해당 고서의 사진이라도 냈다면 몰라도 당시로선 비교할 자료가 없었다”고 말했다. 국보·보물 지정 때 통상적으로 두는 30일 예고기간에도 이의제기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유산청은 법원 판결이 나온 뒤 보물 지정 당시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위법하거나 부당한 처분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한 ‘행정기본법’을 근거로 보물 취소를 결정했다. 앞서 조선 전기 무기 ‘별황자총통’이 국보로 지정됐다가 가짜임이 드러나 해제된 경우(1996년) 등은 있어도 문화유산의 지정 취소 결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관계자는 “지정 취소는 문화유산의 가치가 달라지거나 상실했다고 판단하는 ‘지정해제’와 달리 아예 지정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것”이라며 “만약 적법한 절차에 따라 다시 신청하면 지정될 길이 열려 있다”고 말했다.

현재 ‘대명률’은 국립고궁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국가유산청 측은 “대법원 판결 후 소유주에게 이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원래 소유주가 사망하면서 적법한 상속권리자가 누구인지 검찰과 확인 중”이라고 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가유산 지정 시 보다 철저한 검증 필요성도 제기된다. 앞서 ‘대명률’은 2013년 12월 보물 지정 신청 후 경북도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치고 관계 전문가 3명 이상의 조사를 통해 문화유산위원회에서 지정 가결됐다. 이 과정에서 유물 입수 경위 등을 더 찬찬히 따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지학 전문가인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서책의 경우 동일본이 흔해서 검증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문화재의 출처와 취득 경위 자체가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되는 만큼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