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 같은 춤판서 만난 K미인

(왼쪽부터) ‘스테파’ 안무코치로 활약했던 정보경 안무, 1세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한국미의 현대적 해석에 탁월한 양정웅 연출. [사진 국립극장]

(왼쪽부터) ‘스테파’ 안무코치로 활약했던 정보경 안무, 1세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한국미의 현대적 해석에 탁월한 양정웅 연출. [사진 국립극장]

국립무용단 신작 ‘미인’(4월 3~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도발이다. 시작부터 ‘세계가 주목할 K댄스 대작’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내걸었다. 평창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이자 한국미의 현대적 해석으로 정평난 연출가 양정웅이 연출과 구성을 맡고, 지난해 Mnet ‘스테이지 파이터(이하 스테파)’ 안무코치로 한국무용 대중화에 힘을 보탰던 정보경이 안무를 맡았다. 대극장 공연 최초 ‘여성무용수만의 무대’를 표방한 건 신윤복의 ‘미인도’가 규정해온 한국 여성의 미학적 틀을 깨부수기 위해서다. ‘스테파’의 남성춤에 이어 여성춤까지 반전매력으로 승부하는 셈이다.

“한국의 미를 춤으로 보여주기 위해 다양성 있는 민속무용을 여성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적인 여성미의 원형이 신윤복의 ‘미인도’잖아요. 단아한 미인도를 정형화된 여성미로 본다면 민속춤을 통해 다이내믹하고 파워풀하고 포용과 조화, 상생의 에너지를 가진 다양한 여성상을 ‘신미인도’로 제시하려는 거죠.”(양) “‘스테파’를 하면서 여성 버전도 꿈꿨거든요. ‘스테파’ 인기가 무용계에 없던 현상인데, 그걸 잘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의 연장선에 이 작품이 있어요. 한국무용이 이런 멋진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걸 스테파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정)

미인도에서 막을 열어 ‘신미인도’로 막을 닫는 수미쌍관 구도다. 살풀이·승무·부채춤·북춤·칼춤·탈춤 등 다채로운 민속춤을 통해 액자에 가둘 수 없는 멋진 여성상을 보여준다는데, 민속춤 원형은 볼수 없다. “춤의 형식이 아니라 정서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전체적인 정서는 민속놀이를 변형시킨 ‘놋다리밟기’에 담겨 있어요.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피난시키기 위해 여성들이 몸으로 다리를 놓은 데서 유래한 놀이죠. ‘여성을 이야기하는 민속춤’이라면, 하나의 큰 선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여성들이 몸을 엮어서 누군가를 어딘가로 보낸다는 데서 가녀린 마음들이 모여 아주 큰 강인함이 되는 정서가 느껴지잖아요.”(정)

국립무용단 ‘미인’은 새로운 K패션과 K무용의 만남을 브랜드로 시너지를 노리고 있다.

국립무용단 ‘미인’은 새로운 K패션과 K무용의 만남을 브랜드로 시너지를 노리고 있다.

과연 ‘미인의 춤’은 어떤 것일까. 한국춤만의 춤선이 살아 있되 기막힌 완급조절로 만들어내는 새로운 몸짓이 ‘이날치’ 장영규의 트위스트한 음악에 녹아들어 몹시 힙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한국춤은 힘을 다 풀었을 때 가장 큰 에너지가 나오거든요. 남성이 가진 파워풀한 에너지와는 다르지만, 모든 숨을 내뱉었을 때 나오는 여성춤의 에너지가 훨씬 매력적이죠. 저는 한국춤을 베이스로 컨템포러리를 하는 사람이니까, 거기서 파생된 움직임과 메쏘드를 미인에 녹이고 있어요.”(정)

더 큰 도발은 따로 있다. 보그 코리아 등 다양한 패션잡지에서 30년간 스타일리스트로 활약한 서영희가 의상과 오브제 디자인을 맡아 무용공연에서 부수적인 요소로 여겨지던 패션을 안무와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K패션과 K무용을 하나로 묶은 ‘K컬처’ 상품을 세일즈한다는 빅픽처다. 에스파, 아이브 등 K팝 뮤직비디오를 만든 신호승의 무대디자인까지, 미장센으로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국립무용단 ‘미인’은 새로운 K패션과 K무용의 만남을 브랜드로 시너지를 노리고 있다.

국립무용단 ‘미인’은 새로운 K패션과 K무용의 만남을 브랜드로 시너지를 노리고 있다.

“브랜딩을 위해 춤과 패션의 만남을 택했어요. 좀 충돌하고 불편하더라도 만나게 해서 우리 멋이 좀 많이 알려졌으면 해서요. 해외 행사를 가도 춤 따로 패션 따로 가니 시너지가 아쉽더군요. 춤과 패션이 하나의 브랜드로 같이 간다면 더 어필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한국적인 작업을 할 때마다 늘 서영희 선생에게서 영감을 받았던 터라 이번에 꼭 모시고 싶었어요.”(양) “공연 의상은 첫 경험인데, 두 분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일을 오래 하면서 느끼는 게 시대의 찬스가 있다는 거예요. 전에는 뭘 하려고 해도 같이 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단순히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를 넘어, 전통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는 인재들이 모인 시대가 된 거죠.”(서)

오뜨쿠뛰르 컬렉션을 연상시키는 의상과 오브제가 총 500여점이라니, 춤이 가리지 않을까. 오히려 의상과 오브제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안무 이미지를 확장했다고 한다. “꼭 춤을 춰야 춤이 아니거든요. 서 선생의 옷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장면도 있었으면 해서 강강술래를 제안했어요. 강강술래에서 원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개념만 가져와서 의상을 제대로 보여줄 겁니다. 그 장면만큼은 패션쇼가 되는 거죠.”(정) “한복을 어디까지 모던하게 표현할 수 있을 지가 도전인데, 안무가가 춤을 푸는 방법과 내가 한복을 푸는 방법이 비슷해요. 탈춤에서 탈을 없애면 어떠냐, 적삼이 춤에 방해가 되면 소매를 잘라 버리자는 역발상 코드죠. 무용단의 움직임에서 숭고한 느낌을 받았어요. 숨만 쉬어도 춤추고 있는 듯한 경지에 오른 무용수들을 위해 겸허한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서)

서울시무용단 ‘일무’ 등 한국무용 현대화에 성공한 기존 작품에서 칼군무의 에너지가 ‘킥’이었다면, ‘미인’은 다르다. 군무에도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함께 존재하며 시선이 분산되는 독특한 느낌이다. “우리 작품은 군무의 힘보다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군무에서 흩어져 개별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색깔들을 빠짐없이 보여주고 싶거든요. 29명이 각자 무용수로서 한국 최고의 국립무용단에 왜 존재하는지 증명하는 무대가 되었으면 해요.”(정)

야심차게 K컬처를 표방한 대형 갈라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국립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정구호의 ‘향연’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양 연출은 ‘다양성’을 강조한다. “제가 민속춤으로 보여주고 싶은 건 다양성과 다채로움이고 ‘향연’과의 차별점도 거기 있어요. 민속무용 자체에 다양한 계층과 지역이 담겨있는 것처럼, 우리 창작진 각자의 취향이 충돌하고 조화해서 다채롭게 펼쳐질 거라 생각합니다. 전체지만 그 속에 다양한 개성이 숨어있는, 김홍도나 신윤복의 민속화처럼요.”(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