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대학 10년, 그림책 10년…돌고 돌아 회화 작가 꿈 이뤘죠

화가를 꿈꿨지만 예술 중·고교나 미술대학에 가진 못했습니다. 2005년 중앙대 생활과학대 주거환경학과에 입학한 김은혜(39)씨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죠. 20대의 그는 자신에게, 또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저 누워있거나 일탈하거나 수업을 빠지다 학사경고를 받기도 했죠. 두 번의 긴 휴학이라는 방황 끝에 2015년, 입학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는데요. 그 후 은혜씨는 2022년 첫 개인전을 열고, 매번 갤러리들이 먼저 매입하는 작품을 내놓는 전업 미술작가가 됐습니다.

2021년 예술의전당 ‘청년미술상점’ 프로그램에 선정돼 한가람미술관에 입점했을 때의 김은혜 작가.

2021년 예술의전당 ‘청년미술상점’ 프로그램에 선정돼 한가람미술관에 입점했을 때의 김은혜 작가.

“어릴 적부터 저는 늘 하고 싶은 게 명확했어요. 화가란 꿈이 명확했는데 제가 서 있는 위치는 계속 불명확했죠. 대학 입학 후에도 불명확한 위치와 상황에 그대로 있는 것이 불만이었고, 해결 방법을 찾기보다 모든 걸 놓아버리는 방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냈어요.” 1학년을 마치고도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무작정 휴학을 했죠. 과외 교습부터 피자집·커피숍·음식점 서빙 등 2년간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한창 활기차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 20대 초반에 목적 없이 그저 시간을 보낸 겁니다.  

2학년으로 복학한 은혜씨는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전공인 주거환경학과에서는 디자인적 요소는 물론 인문학, 법적인 주택관리 등 인간의 주거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죠. 문화콘텐츠를 융합전공으로 공부하면서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돼 연극 감상, 영화 비평, 단편소설 쓰기 등 다양한 실험을 한 은혜씨는 자신이 그림 외에도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림책 일러스트를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마침 미술공부를 반대하던 아버지도 지원을 약속했어요. 의욕이 넘쳐 아예 대학을 그만둘까도 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자퇴는 감행하지 않았죠.  

2017년 봄볕에서 출간된 『아빠냄새』는 김은혜 작가가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을 그린 세 번째 책이다.

2017년 봄볕에서 출간된 『아빠냄새』는 김은혜 작가가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을 그린 세 번째 책이다.

그러나 4학년을 앞둔 2010년, 경제적 이유로 다시 휴학할 수밖에 없었고, 2011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 기간을 늘렸습니다. 6개월의 일러스트 수업이 끝난 후 은혜씨는 관련 분야 일을 구했지만 학사 학위 없이는 구직이 쉽지 않았죠. 결국 생활비를 벌기 위해 보습학원에서 초·중학생에게 수학·과학 과목을 가르쳤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죠. 미술을 전공하는 선배와 함께 작업실을 얻어 남은 시간은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생각만큼 그림이 안 그려져서 너무 힘들었어요. 머릿속에는 그리고 싶은 주제들이 마구 떠오르는데 손이 안 따라주니 그랬던 것 같아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사실에 늘 불만족스러워하며 많이 방황했죠.” 학원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도 만만찮았어요. 방황하던 그 시기에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돼준 사람, 바로 남편을 만났습니다. 현실적이고 성실한 직장인인 남편은 은혜씨와는 정반대의 기질과 생활방식을 갖고 있었죠. 무엇보다 예술을 한답시고 우왕좌왕하는 은혜씨의 꿈을 존중해 줬어요. 남편의 지원 덕분에 2014년 4학년에 복학한 은혜씨는 그해 10월 결혼 후 계절학기 수강까지 하며 학점을 채워 2015년 2월 무사히 졸업했죠.


이후 일러스트 수업에서 만났던 어린이 도서 전문 책고래출판사의 우현옥 대표 제안으로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지만 3개월의 인턴 기간을 채우고는 원점으로 돌아갔어요.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 은혜씨에게 조직생활이나 사무업무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기 때문이죠. 우 대표는 은혜씨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책 작가를 권유했고, 책고래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에서 그림책 제작 전 과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김은혜 작가가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나의 공룡기』를 위한 원화(왼쪽 사진) 및 출간을 위해 작업한 더미북 모습.

김은혜 작가가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나의 공룡기』를 위한 원화(왼쪽 사진) 및 출간을 위해 작업한 더미북 모습.

2015년 9~11월에는 은혜씨가 일러스트 작업에 참여한 책이 두 권 출간됐어요. 『놀면서 배우는 한국 축제』와 『천재화가 신사임당』이죠. 세 번째 책 『아빠냄새』가 나온 2017년엔 아이도 생겼습니다. 이후 2020년까지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했죠.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는 사랑스럽고 예뻤지만 육아에 매몰된 자신은 점점 사라져가는 느낌이던 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2020년 5월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이 주관하는 *콘텐츠 창의인재동반사업 출판분야 플랫폼기관으로 책고래출판사가 선정되면서 은혜씨가 멘티로 참여하게 된 거죠.  

“참여하면서 목표를 ‘무조건 마무리를 하자’로 정했어요. 저는 대학을 10년 다녀 졸업이 늦었고, 작업실에 주야장천 앉아 있었지만 온전히 내 힘만으로 제대로 된 결과물이나 성과를 내지 못했죠. 제가 하는 일들이 늘 마무리가 안 되는 것이 큰 스트레스였는데 육아를 하면서 그게 정점에 이르렀어요.”
6개월의 사업이 끝나고 1년의 편집 기간을 거쳐 2022년 1월, 은혜씨가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나의 공룡기』가 나왔습니다. 많은 일러스트 작가들의 목표가 직접 쓰고 그린 그림책을 출간하는 것이라면 은혜씨는 일러스트 입문 10년 만에 목표를 이룬 거죠. 『나의 공룡기』는 그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엄마와 아이의 성장기에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은혜씨는 다섯 살까지 말을 안 했던 아이가 무척 좋아하던 공룡을 그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 보겠다고 마음먹었죠.  

2022년 홍익대학교에서 개최된 아시아프에 히든아티스트로 출품했던 작품들.

2022년 홍익대학교에서 개최된 아시아프에 히든아티스트로 출품했던 작품들.

“제 아이가 또래보다 말이 늦었어요. 자꾸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게 되고 심지어 장애 판정을 받아야 하나 노심초사했었죠. 아이가 공룡을 매우 좋아했던 시점에 제가 제일 잘 그렸던 게 공룡이었거든요. 말도 못하는 아이가 공룡 그림의 비율이 틀리면 다시 그리라고 의사표시를 하면서 저와 소통하기 시작했죠. 다행히 다섯 살부터 말을 시작했어요.”

『나의 공룡기』 출간 후 우 대표로부터 출판사 소속 작가 제안을 받았지만, 명확한 결과물이 바로바로 나오는 것을 선호하는 은혜씨에게 생각보다 길고 지난한 그림책 작가의 길은 버겁게 느껴졌죠. “1년이 넘게 출간을 기다리며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 시간 동안 그림 작업을 했고, 콘진원 프로그램에서 알게 된 회화 작가 선배와 교류하면서 그림에 대한 자극도 받으며 저에게 부족했던 그림 기법이나 한국화도 배워 단체전에도 참여하게 됐죠. 그때부터 회화 작가로서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은혜씨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2020년은 국내 미술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던 시기입니다. 코로나19로 누구나 격리될 수밖에 없던 때 은혜씨는 그림을 통해 ‘나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표현할 수 있었죠. 은혜씨에게 그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였어요. 보습학원 근무와 육아를 병행하는 힘든 시간 속에서도 그림 작업을 꾸준히 해나갈 수 있는 이유였죠.   

김은혜 작가는 2020년 용인에 위치한 그림책카페 ‘감꽃별’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 프로그램 성과 발표를 했다.

김은혜 작가는 2020년 용인에 위치한 그림책카페 ‘감꽃별’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 프로그램 성과 발표를 했다.

2021년에는 *예술의전당 ‘청년미술상점’ 프로그램에 선정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복도 외벽에 작품을 전시하고,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핑크색 배경의 공룡 그림을 판매하기도 했어요. 이후 개인전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2022년 4월 첫 개인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코로나19로 일부러 보러 오는 관람객은 거의 없었는데 갤러리 아미디가 버스 정류장 앞이라 오가며 들리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또 작품 판매가 된 것도 신기했죠. 조그만 소품 6개짜리 시리즈를 한 회화 작가님이 다 사셨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제 SNS를 보고 일부러 찾아오신 거였어요.”

개인전 이후 여러 갤러리에서 포트폴리오 요청 연락이 왔고, 2022년 5월엔 *아시아프에 작품이 선정돼 7~8월 오프라인 전시에 참여했죠. 이때도 사무국으로부터 그림 판매 연락을 받으며 내친김에 그해 8월 서울 종로구 갤러리M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신작을 여럿 소개했는데, 아시아프 전시에 이어 이번에도 예인갤러리 정흥열 대표가 작품 매입에 나서며 2023년 1월 은혜씨는 예인갤러리에서 초대개인전을 개최하게 됐죠.  

2024년 9월에 제작한 작품 ‘감정의집69’. 2022년 첫선을 보인 감정의집 시리즈는 현재 90번까지 나왔는데 ‘감정의집69’를 비롯해 시리즈 중 3분의 2가 판매됐다.

2024년 9월에 제작한 작품 ‘감정의집69’. 2022년 첫선을 보인 감정의집 시리즈는 현재 90번까지 나왔는데 ‘감정의집69’를 비롯해 시리즈 중 3분의 2가 판매됐다.

2022년 10월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활동할 것을 결심한 그는 보습학원을 그만두고 한 달 뒤 갤러리 아트버디 신진작가공모전에 응모했어요. 결과는 3등. 1·2등이 홍익대 석·박사 출신인데 반해 은혜씨는 비전공 학사 출신으로 3등을 수상해 특별히 주목받았죠. 작품에 대한 열정이 끊임없이 솟았고 무서운 속도로 신작을 내놓으며 2023년 6월에는 서울 종로구 갤러리 너트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어요. 2023년 6월엔 갤러리 아트버디 신진작가공모전 수상자 전시회에 참가했는데, 갤러리 아트버디도 은혜씨의 작품을 매입했습니다.

2022년 12월부터 *포아티스트(4-rtist)의 갤러리 포아트 소속 작가로 활동하면서 2023~2024년에는 거의 매달 국내는 물론 대만·두바이 등 해외 아트페어에 참가했죠. 열심히 작품을 내놓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결과, 은혜씨는 2024년 12월 ‘서울아트쇼 2024’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관람객들 사이에서 ‘나 이 그림 알아, 이 그림 봤어’라는 말이 들려온 거죠. 자신의 그림을 사람들의 눈에 익숙하게 만드는 데 3년이 걸린 셈이에요.

2025년 1월에는 서울 마포구 논스케일드 전시장에서 ‘감정의집’ 시리즈와 공룡이 등장하는 ‘마을’ 시리즈 등 신작 15점을 포함 총 30여 점의 작품으로 기획전시를 열었어요. “2022년 8월 첫선을 보인 감정의집 시리즈가 개인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면 마을 시리즈에선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존재의 다양한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현재 90번까지 나온 감정의집 시리즈 중 3분의 2는 판매됐죠.” 은혜씨의 작품은 다른 회화 작가나 갤러리 대표가 먼저 매입하면서 그만큼 좋은 평판이 쌓였습니다. 감정의집 시리즈 1·2번과 마을 시리즈 1·2번은 정 대표가 개인 소장 중이고, 포아트에서도 감정의집 시리즈 일부 작품을 매입했죠.    

김은혜 작가는 2025년 6번째 개인전 ‘우리 잘살자’에서 새로운 시리즈의 메인 작품으로 100호 크기의 ‘space 3’을 선보였다. 해당 작품은 개인전에서 판매됐다.

김은혜 작가는 2025년 6번째 개인전 ‘우리 잘살자’에서 새로운 시리즈의 메인 작품으로 100호 크기의 ‘space 3’을 선보였다. 해당 작품은 개인전에서 판매됐다.

작가로서 은혜씨의 목표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겁니다. 또 회화를 기본으로 캐릭터 굿즈나 조소 등 다른 형태로 확장하는 작업도 계획 중이죠.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마음을 다해 단정하고 예쁘게 살고 싶다”고 답했어요. 단정하다는 것은 외모보다는 태도를 의미하며 비록 자신의 생활이 비루하더라도 정신적인 가치가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작가 또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뜻입니다.
“개인전 할 때는 진짜 발가벗겨진 기분이에요. 때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극도의 부담감을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러나 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티를 안 내고 당당하려고 해요. 작업할 때 그림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예요. 잘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 좀 더 완성도 있게 마감해서 보내고 싶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린 사람은 알거든요.”

은혜씨는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든 없든 지금 서있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정성스럽게 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어른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끝까지 해보면 좋겠어요. 부모님이나 어른들의 경제적 지원이 없더라도 저처럼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돌고 돌아서 결국 그걸 하게 돼요. 만약 하고 싶은 게 없다면 지금 그 시점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정성스럽게 해보면 좋겠어요. 내 앞에 주어진 것이 비록 하찮고 작은 일이라도 정성스럽게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것이 자기 자신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콘텐츠 창의인재동반사업: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젊은 창의인재 양성을 위해 창작 분야의 고급 전문가(멘토)를 통한 도제식 개별 멘토링을 지원하여 능력 개발을 돕는 사업. 방송·음악·공연 등 총 16개 분야 기관의 기획·창작(제작)·개발 관련 분야를 대상으로 한다.

*예술의전당 ‘청년미술상점’: 전국의 청년작가를 위한 프로젝트로, 매주 2명의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에서 직접 소개·판매해 관람객은 작품을 감상하고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아시아프(ASYAAF·Asian Students and Young Artists Art Festival): 2008년부터 전국 청년 작가들에게 경력과 관계없이 전시 및 작품 판매 기회를 제공하고,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 관람객에겐 참신한 작품을 합리적 가격에 소장할 수 있는 청년 아트 페스티벌이다.  

*포아티스트(4rtist): 미술·영상·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아티스트를 위한 플랫폼. 그중 미술 섹션 ‘포아트’는 작품 전시·판매 및 아트페어 참여, 아트 콘텐트 제작, 스튜디오 대관 등을 하고 있다.  

*서울아트쇼: 2012년부터 ‘모두를 위한 예술’을 모토로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열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 13회를 맞이한 서울아트쇼 2024에는 12월 24일~2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150여 개 화랑(갤러리)이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