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아내 '조용한 내조' 원칙 "그냥 믿어버려유~늘 한결같아" [월간중앙]

독점 인터뷰| 김동연 경기지사 '40년 인생 단짝' 정우영 여사
 
대쪽 같은 남편…교육자·공직자 집안서 자란 덕에 익숙해
정치인 김동연의 ‘공명정대’ 소신 지켜준 배우자로 기억되길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아내 정우영 씨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새로운물결 기호 9번으로 나선 남편과 함께한 유세 활동에서다.

이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후보자 거리 유세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남편과 동반 유세를 하거나,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골목길 등을 홀로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도지사 후보 김동연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후보자 번호와 남편의 얼굴이 담긴 명함을 돌리며 “김동연 후보가제 남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의 든든한 내조가 더해진 덕분일까, 김동연 후보는 도민의 선택을 받아 제36대 경기도지사가 됐다.

2022년 2월, 제20대 대통령 선거 새로운물결 기호 9번으로 나선 김동연 후보자와 부인 정우영 씨의 홍대 거리 유세 활동 모습. [사진 정우영]

2022년 2월, 제20대 대통령 선거 새로운물결 기호 9번으로 나선 김동연 후보자와 부인 정우영 씨의 홍대 거리 유세 활동 모습. [사진 정우영]

이후 도지사 부인으로서 정우영 씨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김 지사와 함께하는 공식행사는 물론 각종 봉사활동, 시장 방문, 취약계층 돌보기 등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도맡아 조용한 내조를 해왔다. 인구 1400만 명의 대한민국 최대 지방정부인 경기도를 위해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남편의 눈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정씨는 세심히 살피며 탄탄한 내조로 뒷받침했다. 언론에 나서길 지극히 꺼렸던 정씨가 월간중앙을 통해 마음에 꾹꾹 눌러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의 첫 만남, 기억하시나요?
“직장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 저는 서울은행을 다녔는데 남편은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초급 행원으로 한국신탁은행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두 은행이 합병해 서울신탁은행이 됐는데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지금의 하나은행이지요. 두 은행이 합병된 덕분에 만남 셈이에요. 당시 서울신탁은행 본점 증권대행부였는데 여직원이 100명 가까이 되는 큰 부서였습니다. 남편은 그때 서무주임 역할을 하며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가끔, 무심코 말을 걸기도 하고 일도 도와주고 그랬어요. 직원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을 기회도 몇 번 있었고, 그게 전부였죠.”
 


정우영 씨가 은행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모습. 직장 동료로 처음 김동연 지사를 만났다. [사진 정우영]

정우영 씨가 은행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모습. 직장 동료로 처음 김동연 지사를 만났다. [사진 정우영]

청년 김동연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첫인상은 부잣집 도련님처럼 깔끔하고 단정했습니다. 항상 자기 일에 성실했고, 업무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니까요. 40년 넘게 같이 지낸 세월을 돌아봐도 그래요. 첫인상대로 변함없습니다.”
 

첫눈에 반했던 건 아니었나 보네요?
“저와 나이는 동갑인데 남편이 생일이 빨라 학교도, 입사도 한 해 먼저 했습니다. 호감은 있었지만 연애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할 때였어요. 그 당시 집안 분위기상 연애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거든요. 저를 빼고서 다른 형제들은 모두 중매로 결혼했어요. 그러다가 그 사람이 군대에 갔고 저도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서로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연이 이어졌나요?
“연말에 은행으로 연하장이 왔어요. 보낸 사람 이름도 없이, 육군 이병 계급만 쓰여 있는 연하장이었죠. 성격만큼이나 단정한 필체를 보니 누군지 금세 알겠더라고요. 그때부터 엽서를 계속 받았습니다. 특히 고시 공부 시작하고서 2~3년 동안 매주 빠짐없이 엽서를 써서 보내줬습니다. 공부가 바빠서 한 달에 한 번만 보기로 했는데, 매주 받아보는 엽서가 서로 연결된 느낌을 줬죠. 지금도 해외 출장을 간다든지, 집을 떠나 있거나 특별한 날이면 꼭 엽서를 써서 보냅니다. 항상 바깥 일로 바빠서, 집에 와도 서재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지만, 엽서로 마음을 전하는 건 아직도 그대롭니다. 참 한결같이 변함없는 사람입니다.”
 

김동연 지사가 결혼 전부터 정우영 씨에게 꼬박꼬박 보낸 러브레터들. [사진 정우영]

김동연 지사가 결혼 전부터 정우영 씨에게 꼬박꼬박 보낸 러브레터들. [사진 정우영]

자상했던 아버지…집안서 연애결혼은 완강히 반대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1983년 5월에 약혼, 10월에 결혼했습니다.”
 

나름 연애결혼이신데, 결혼 과정은 수월하셨나요?
“결혼은… 우리 집 반대가 심했어요. 연애결혼 자체를 싫어하시기도 했지만, 그 사람에 대해 ‘은행이나 잘 다니지, 주제넘게 무슨 고시 공부냐’는 생각이 컸던 것 같습니다. 반대가 너무 심하니까, 한번은 친정 오빠가 자고 있는 제 머리맡에 와서는 ‘우영아,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거야’라고 위로한 적도 있어요. 남편이 낮에는 은행원, 밤에는 야간대학생, 새벽에는 고시생으로 생활한 끝에 1982년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 합격했고, 그다음 해인 1983년에 드디어 결혼했습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평생 충남지역에서 교편을 잡으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도 당시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충남 논산의 강경중학교 인근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고, 가장 오래 산 곳은 천안입니다. 천안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첫 근무지인 공주중학교를 시작으로 천안북중학교에서는 교감으로, 그리고 도고중학교에서 초대 교장을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는 도고중학교 교가를 직접 작사하시고, 우리 가족만의 노래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집은 즐거웁고 화목한 가정.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로 시작하는 우리 집 노래는 4절까지 있습니다. 늘 온 가족이 같이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당시 흔하지 않은 카메라로 가족의 생일 아침마다 기념사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등교 시간에 늦을까봐, 입이 뾰로통하게 나온 채 찍힌 제 모습이 빛 바랜 사진으로만 남아 있지만, 아버지의 기억이 담겨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다정함이 혹시 조부모님의 영향일까요?
“할아버지는 초대 천안지방법원장을 지내신 정봉모 판사입니다. 한국전쟁 때 피란 가지 않고 법원 청사를 지키다가, 안타깝게도 북한 인민군에 의해 희생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천안지방법원 1층 로비에 할아버지 흉상과 평생 좌우명인 ‘공명정대는사법의 요체다’가 새겨져 있습니다. 다만, 돌아가신 날짜가 정확하지 않아 현충일을 기일로 생각하고서, 매년 6월 6일 남편과 흉상을 찾아 추념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등 가족 중에 공직자가 많아서인지, 남편이 말하는 ‘공직자의 분위기’가 익숙합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요?
“아버지께선 입장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시던 중에 갑자기 작고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저는 여고 3학년이었습니다. 저는 2남 4녀 중 넷째, 딸로는 둘째 딸인데, 어머니 홀로 어린 육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죠.”
 

김동연 경기지사와 부인 정우영 씨의 신혼여행 사진. [사진 정우영]

김동연 경기지사와 부인 정우영 씨의 신혼여행 사진. [사진 정우영]

대가족 시댁살이…시어머니 사랑에 감사

어머니 홀로 육남매를 키우시기가 쉽지 않으셨겠네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천안여고 졸업과 동시에 은행에 취직했습니다. 어머니 혼자 육남매를 대학에 보내긴 힘드셨을 때였죠. 은행에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숭의여자대학에서 보육학을 전공했습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는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동국대학교에서는 유아교육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직장 다니며 석사까지 마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1983년 결혼하고도 줄곧 직장에 다녀야 했습니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셨고, 한 살 아래 시동생과 두 명의 시누이가 있는 대가족이어서 저도 생계를 보태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죠. 1986년 큰아이를 낳고서 직장을 다니다가 남편의 미국 유학을 기회로 퇴직했습니다. 그 뒤론 귀국해서 지금까지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습니다.”
 

소위 ‘경단녀’가 되신 거네요?
“남편이 지금의 제 ‘경단녀’ 생활을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재능을 살리라고 자주 권하곤 했어요. 휴대폰으로 사진 찍기 좋아하는 것을 알고서는 30여 년 공직 생활 끝에 받은 퇴직금으로 아마추어 사진작가에 어울릴 법한 카메라를 사주었습니다. 제가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선물입니다.”
 

결혼 후 시댁에서 생활했다고 하셨는데, 어떠셨나요?
“큰며느리가 된 시댁은 친정 못지않은 대가족이었습니다. 남편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한 뒤 소년 가장으로 모진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꿈 많던 여고 시절 친정아버지를 보낸 저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퇴근하고 들어오는 저랑 남편이 먹을 저녁밥을 따로 챙겨두셨죠. 시집살이는커녕, 늘 어머니께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시어머니는 가장 노릇을 하던 남편보다 저를 더 편하게 생각해 주십니다.”
 

아들에게 갑자기 찾아온 질병, 그리고 이별

결혼 후 또는 인생에서 겪은 최대 난관을 꼽는다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큰아이를 먼저 보냈을 때였습니다. 제 아이는 스물일곱이었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워싱턴에 있는 국제기구를 다니고 있었어요. 정말 착하고 아름다운 청년이었죠. 이름을 부르기조차 아까운 소중한 아이였습니다. 배려심이 많아서 누구나 좋아하던 청년이었지요. 급성 혈액암에 걸렸고, 2년여를 투병하다 제 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투병을 시작할 때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느라 미국에 있을 때였죠. 운동을 좋아했고 장교로 입대를 앞두고 있을 때여서 몸이 아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갑자기 발병해 2년 반 투병하면서 병원에 오래 있었습니다. 골수 이식을 두 번이나 받았고요. 옆에서 지켜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기증자가 나타나 골수 이식을 받았는데 효과가 없어 남편이 직접 골수 이식을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었어요.”
 

김 지사께서 직접 골수 이식을 하셨다고요?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으로 재직할 때였습니다. 병원에서 골수를 뽑은 뒤 회복하는 동안 손을 오므렸다 폈다, 계속 움직이라고 했는데도, 얼마나 바쁜지 그것조차 못하고 병원에서 남은 일을 처리할 정도였어요. 혈관에 골수 채취관을 꽂은 채, 보이지 않게 가리고서 국무회의에 가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직장에 아들의 투병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고 나중에 부고도 내지 않았습니다.”
 

아드님이 장교 입대를 앞두고 발병했다고 하셨는데…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병무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 진료 기록을 보냈는데, 본인이 직접 병무청에 와서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더군요.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아들 친구들과 함께 아이를 부축해서 병무청에 데리고 갔습니다. 가보니 계단이 너무 많고 가파른 거예요. 올라가서 군의관에게 잠깐만 1층에 내려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해서, 그 아픈 애를 업고 겨우 올라갔습니다. 다시 내려오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중에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다들 그렇게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같이 화를 내주면 좋겠는데,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했던 남편 마음이 정말 아팠을 거예요. 제 앞에서는 먼저 간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울지 않는 남편이지만, 혼자 우는 모습을 여러 번이나 봤습니다. 저도 모른 체했고요. 남편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제가 잘 알죠. 12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가슴이 먹먹합니다.”
 

스튜디오에서 찍은 가족사진. [사진 정우영]

스튜디오에서 찍은 가족사진. [사진 정우영]

집안에서 김 지사는 어떤 모습인가요?
“항상 일이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집에 들어와도 서재 책상에 앉는 일이 많고요. 서재에서 책을 보거나 일하거나 아니면 짬짬이 저와 함께 산책 겸 운동을 하곤 합니다. 다른 집 남편들처럼 좀 뒹굴뒹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밖에서 보이는 김 지사는 강직한 모습인데요. 남편, 아버지로선 어떤가요?
“의외로 자상한 면도 있습니다. 유학 가서 세 식구가 살면서부터 주방에도 들어오고 빨래를 정리해 놓기도 합니다.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실 때는 꼭 자기가 나서서 내려줍니다. 남편이 내려준 커피가 정말 맛있어요. 간혹 바쁜 일이 없는 주말이면, 근처 카페에 나가서 샌드위치랑 커피를 시켜 놓고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같이 보내는 소소한 일상이 참 좋은데, 그럴 기회가 적긴 합니다.”
 

“사회 환원한다며 월급 절반 기부, 신문 보고 알아”

40년 이상 함께했어도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나요?
“시아버지 묘가 도로에 편입되면서 이장한 적이 있어요. 인부가 있는데도 직접 하나하나 유골을 수습해 상자에 담아 조수석에 모시고는 시아버지가 살던 고향 마을, 어머니와 지내던 신혼집 등을 돌면서 백골이 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남편 책에서 읽었습니다). 철이 들고서 아버지와 나눌 수 없었던 대화의 버킷리스트였답니다. 큰아이와 책을 쓰기로 약속했던 남편의 책을 읽으며, 낡은 사진으로나마 아버지의 기억을 가진 제가 오히려 미안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큰아이 기일이 되면, 경기도 공원묘지에 갑니다. 남편은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서, 얼마간이나 물끄러미 아이를 쳐다봅니다.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있어요.”
 

내 배우자인 ‘김동연’이 다른 정치인, 공직자보다 특별한 부분을 꼽는다면?
“늘 한결같은, 진정성 있는 정치인입니다. 정치뿐 아니라 삶 자체가 다 그렇습니다. 고시를 준비할 때부터 공직자로서의 사명감과 청렴을 이야기하곤 했어요. 연애편지로 보낸 엽서에 공직자의 청렴한 생활을 강조하던 남편이 기가 찰 정도였다니까요. 합격하기도 전부터 저런 생각을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말하길, 자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군요.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도 다녀오고, 경제부총리가 돼서 한 나라의 경제를 총괄하는 일까지,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고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은혜를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항상 했습니다. 퇴직 후 아주대 총장 시절에는 공무원 연금 받는 정도의 금액을 빼고서, 나머지 월급은 기부하겠다더군요. 나중에 보니 수입의 반 이상을 기부했더라고요. 그 뒤 부총리가 돼서도 마찬가지고요. 아내인 저는 오히려 신문 기사를 보고서야 자세히 알았을 정도예요. 경기도지사 취임하고는 31개 경기도 시·군마다 한 개 시설에 매월 기부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람이에요.”
 

정치인의 길을 걷는 배우자를 내조하는 게 힘들진 않나요?
“크게 힘든 건 없습니다. 다만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몇 십년 지기 친구들에게 입에 담기 힘든 비난을 받았을 때, 남편이 측은해 보였습니다. 양 극단화되어 있는 정치 현실을 타파한다며 정치를 시작한 남편의 마음을 오랜 죽마고우도 이해하기 힘들었나봅니다. 정치 시작한 지 몇 년 안 됐지만, 남편을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아졌습니다. 산책하거나 카페에 앉아 있거나 그럴 때 인사하고 사진도 찍자고 그래요. 남편이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죠. 오늘처럼 언론 인터뷰를 하는 것도 그렇고요. 힘들다기보다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런 점을 빼고는 공직자의 아내일 때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관료의 아내로 산 세월이 30년 넘다 보니, 늘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살고자 했던 덕분인 것 같습니다. 연애 시절 남편이 보낸 엽서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함께한 지 40년을 훌쩍 넘긴 오랜 시간에도 김동연 경기지사가 아내 정우영 씨를 바라보는 눈길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사진 경기도]

함께한 지 40년을 훌쩍 넘긴 오랜 시간에도 김동연 경기지사가 아내 정우영 씨를 바라보는 눈길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사진 경기도]

“김동연의 소신 지켜준 배우자로 기억되고파”

지금까지 조용한 내조를 해 오고 계시는데, 원칙이 있나요?
“충청도 식으로 말하자면 ‘그냥 믿어버려유~’입니다. 남편이 알아서 잘하니까 그냥 믿고 지켜봅니다. 누구보다 저는 남편을 신뢰하고 믿습니다. 40년 넘게 가까이서 지켜봤잖아요. 그 이상 무엇으로 증명하겠어요? 남편은 ‘그게 될까’ 싶은 일도 척척 해내더라고요. 나중에 보면 이뤄지고, 올바른 판단이었구나 하게 되니까 믿고 지켜봅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응원이기도 하고요. 대신에 집안일은 남편이 신경 쓰지 않도록 챙깁니다. 꼭 알아야 할 얘기만 하고 굳이 몰라도 될 얘기는 하지 않죠. 남편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또 저를 굳게 믿고 있고요. 그런 신뢰가 중요하지, 특별히 다른 내조 방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치인 배우자로서의 삶은 어떤가요?
“남편을 믿고 응원하지만 저에겐 저의 삶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부총리였고 도지사지, 저는 아니잖아요. 남편에겐 남편의 사명과 역할이 있고, 저에겐 정우영의 삶이 있는 거죠. 남편은 늘 그런 저를 응원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드러내지 않고, 우리 가족이 받은 감사함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요.”
 

사회 환원, 김 지사도 동의하신 부분인 거죠?
“부총리 그만두고 남편이 저에게 돈 버는 일 안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연금으로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봉사하고 살자고. 알고 보니 실제로 연봉 수십억 넘는 제의도 여럿 받았다고 하는데,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하더라고요. 부총리씩이나 지낸 사람으로서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요. 저도 그러자고 했습니다. 저도 그게 더 편했어요. 심지어는 국무총리직을 제안하는 대통령의 전화조차 거절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경기도지사 당선되고 관사도 안 쓰고 있어요. 도민에게 개방하자는 취지였지요. 도청에서는 대신 넓은 아파트를 관사로 구하겠다고 했는데 거절하고 저희 비용으로 도청 근처 아파트를 전세 얻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요. 우리는 크게 돈 쓸 일도 없고 둘이 소박하게 살면된다는 생각입니다. 다행히 그런 점에서는 우리 둘이 잘 맞아요. 혹시라도 제가 뭔가를 바라서 남편이 소신을 지키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해요. 지금까지도 그래왔고요.”
 

정우영은 어떤 배우자로 기억되기를 원하나요?
“김동연의 소신을 지켜준 정치인의 배우자라고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제 아이의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박세나 월간중앙 기자 park.sen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