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외교정책협회(FPA)가 수여하는 메달을 받고 만찬사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은행
한은에 따르면 이 총재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외교정책협회(FPA)로부터 ‘메달(medal)’을 수상한 후 만찬장에서 이같은 소감을 밝혔다. 그는 “대통령 탄핵이 조기 대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재정 정책에 대한 양당의 견해가 상반된 가운데 재정 부양책을 언급할 경우 정치적 편향으로 비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경을 촉구한 데 대해선 “계엄 사태 이후 내수가 예상보다 빠르게 위축되고 있었다”며 “연초 성장률 전망의 급격한 하락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금리 인하와 함께 어느 정도 추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추경안이 통과된다면 한국의 경제 정책이 정치와 분리돼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어 국가신용 등급 하락 방어에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추경 언급이 정치적 중립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시간이 제 결정의 옳고 그름을 평가해 줄 것”이라며 “중앙은행가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하지만, 케인스가 그의 스승 마셜을 가리켜 말했듯이, 경제학자는 때로는 정치인만큼 현실적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총재는 ‘정치적 불확실성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주제로 한 이번 만찬사를 통해 “지난 5개월간의 정치적 격동기를 겪으며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자유로운 것뿐 아니라 정치로부터도 독립성을 확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단 걸 인식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은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중앙은행의 특성에 힘입어 ‘계엄사태가 우리 경제와 환율에 미친 영향’ 등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고, 가장 필요한 시점에 객관적 정책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이 총재는 계엄-탄핵-조기 대선으로 이어진 정치적 격변에 대해 “계엄령 선포 이후 고조된 정치적 불확실성이 그간 대외 환경 변화로 인한 어려움을 한층 가중시켜 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면서도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한국 민주주의의 강인한 회복력을 확인하는 계기도 됐다”고 했다. 이어 “미국은 오랜 기간 한국의 민주주의 여정을 함께 해왔다”며 “복잡한 지정학적 긴장, 무역갈등 속에서도 굳건한 한미 관계는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한은에 따르면 미국 비영리 기관인 외교정책협회가 수여하는 메달은 국제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책임감 있는 글로벌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에게 주는 권위 있는 상이다. 역대 수상자로는 장클로드 트리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존 윌리엄스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