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대중을 염두에 뒀다” 전주영화제서 특별전 여는 배창호 감독

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배창호(72) 감독은 자신의 작품과 관객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빛나는 눈이었다. 예전과 달리 자본의 힘이 더 강력해진 영화 시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후배들을 안타까워하며 잠시 어두운 낯빛이 됐다. 김현동 기자

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배창호(72) 감독은 자신의 작품과 관객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빛나는 눈이었다. 예전과 달리 자본의 힘이 더 강력해진 영화 시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후배들을 안타까워하며 잠시 어두운 낯빛이 됐다. 김현동 기자

시대를 뛰어넘어 내 영화를 상영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죠.
40여 년간 감독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설레는 표정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을 앞둔 배창호(72) 감독을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간만에 봄볕이 내리쬐는 따뜻한 오후였다. 새 관객을 만날 자신의 작품들을 떠올리는 그의 눈은 빛을 받아 더 반짝였다.

'황진이'(1986)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분기점이 되는 영화다. 대담집『배창호의 영화의 길』(2022)에 따르면 "영사기가 고장났다고 항의하는 관객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작들과 달랐다. 그는 대담집에서 "'황진이'가 첨가물이 배제된 생수와 같은 역할을 하기 바랐다"며 소수의 관객이 좋아하게 된 이유를 짐작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황진이'(1986)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분기점이 되는 영화다. 대담집『배창호의 영화의 길』(2022)에 따르면 "영사기가 고장났다고 항의하는 관객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작들과 달랐다. 그는 대담집에서 "'황진이'가 첨가물이 배제된 생수와 같은 역할을 하기 바랐다"며 소수의 관객이 좋아하게 된 이유를 짐작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꿈'(1990)의 한 장면. 이광수 소설가의 원작에서 인물과 일부 설정 외엔 다르게 만든 부분이 많다. 그는 2022년 낸 대담집에서 "현실과 꿈,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환을 영화적으로 구성했다"고 전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꿈'(1990)의 한 장면. 이광수 소설가의 원작에서 인물과 일부 설정 외엔 다르게 만든 부분이 많다. 그는 2022년 낸 대담집에서 "현실과 꿈,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환을 영화적으로 구성했다"고 전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30일 개막하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선 그의 영화 세계를 정리한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업’(2025)이 첫 공개된다. 이와 함께 그의 연출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황진이’(1986), ‘꿈’(1990)을 상영한다. 2022년 열린 감독 데뷔 4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소개되지 않은 작품 중 3편이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는 배창호 감독이 시사를 준비하면서도 매번 울며 볼 정도로 가슴 아픈 이산가족 자매의 이야기다. 그는 "달동네, 탄광촌, 염전 동네 등 지금은 유물이 될 법한 장소들이 영화에 많이 담겨있다"며 "기록적 측면에서도 보기 좋은 영화"라고 소개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는 배창호 감독이 시사를 준비하면서도 매번 울며 볼 정도로 가슴 아픈 이산가족 자매의 이야기다. 그는 "달동네, 탄광촌, 염전 동네 등 지금은 유물이 될 법한 장소들이 영화에 많이 담겨있다"며 "기록적 측면에서도 보기 좋은 영화"라고 소개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고(故) 박완서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한국전쟁 도중 피난길에 나섰다 이산가족이 된 자매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가 다시 보며 가장 많이 울었던 영화기도 하다. ‘황진이’는 흥행 감독으로 유명했던 그가 롱테이크·클로즈업 등 과감한 작가적 시도를 펼친 작품이다. 당시 대중의 호불호는 크게 갈렸다. ‘꿈’은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 ‘조신의 꿈’을 바탕으로 이광수 소설가의 동명 소설에 기반을 둔 영화다. 이 또한 ‘황진이’처럼 연출과 편집에 새로운 시도를 했다. 

배창호 감독은 종이에 기진무량(其進無量)을 적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한자성어라고 말했다. '나아감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를 하려면 나아가는데 끝이 없어야 한다. 시대를 알아야 하고, 젊은 사람들과 호흡해야 한다. 머물러있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배창호 감독은 종이에 기진무량(其進無量)을 적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한자성어라고 말했다. '나아감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를 하려면 나아가는데 끝이 없어야 한다. 시대를 알아야 하고, 젊은 사람들과 호흡해야 한다. 머물러있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1980~1990년대에 발표된 작품을 상영한다. 2025년의 관객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면.
“보기에 따라 비판적인 눈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사법이 좀 어색하거나 전개가 좀 지루할 수 있다.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본다면 영화에서 취할 것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업’ 상영을 마치고 1시간 동안 마스터클래스(관객과의 만남)가 예정돼있다.
“영화의 연기 연출과 표현력, 영상적인 역동성 등 발전한 면이 여럿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나 영화적 표현력에 대해선 늘 아쉬움을 느낀다. 회화나 소설·연극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져 온 영화적 표현의 맥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자 한다.”
배창호 감독은 실제 장소들이 영화에 담겼을 때 갖는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60년대나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 간판을 기준으로 보면 프로덕션 디자인의 퀄리티를 판단할 수 있다"며 "현실과 재창조된 세계가 잘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 영화란 장르"라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배창호 감독은 실제 장소들이 영화에 담겼을 때 갖는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60년대나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 간판을 기준으로 보면 프로덕션 디자인의 퀄리티를 판단할 수 있다"며 "현실과 재창조된 세계가 잘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 영화란 장르"라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배창호의 클로즈업’은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공동연출한) 박장춘 감독은 내 영화의 클로즈업에 관한 논문을 썼다. 박 감독이 지난해에 다큐멘터리를 제안했다. 처음엔 손사래를 쳤지만, 내 영화 촬영지 위주의 에세이 영화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어떤 곳을 다시 찾았나.
“내 영화 18편 중 ‘철인들’(1982), ‘고래사냥2’(1985)를 제외한 16편의 촬영지에 향했다. 동해안·설악산·경주 등 국내와 미국의 데스밸리(깊고 푸른 밤·1985), 일본의 마쓰야마(흑수선·2001) 같은 해외 장소도 갔다.”
 

촬영지와 영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인물과 더불어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요소다. 영화의 공간을 귀하게 여기는 게 중요하다. ‘흑수선’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때 시나리오에는 다른 장소를 적어놨는데, 당시 서울역이 폐쇄된다는 얘길 듣고 급히 바꾸어 찍었다. 영화에 기록하고 싶어서다. 요즘은 돈을 써서 세트를 만들기도 하는데, 예전엔 여건이 안 됐다. 그게 좋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배창호 감독은 데뷔 당시 '영화산업계와 타협하는 게 아니라 적응을 하자'는 것이 지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게 지금의 생각을 묻자 "지금은 워낙 제작비가 어마어마해 타협을 넘어 순응할 수밖에 없는 시대"라며 안타까워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달콤한 작품들을 넘어 정제된 표현으로도 충분한 작품을 기대해 본다"고도 덧붙였다. 김현동 기자

배창호 감독은 데뷔 당시 '영화산업계와 타협하는 게 아니라 적응을 하자'는 것이 지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게 지금의 생각을 묻자 "지금은 워낙 제작비가 어마어마해 타협을 넘어 순응할 수밖에 없는 시대"라며 안타까워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달콤한 작품들을 넘어 정제된 표현으로도 충분한 작품을 기대해 본다"고도 덧붙였다. 김현동 기자

자신을 어떤 감독이라고 생각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늘 대중을 의식하며 영화를 찍었다. 대중성의 의미가 조금씩 변화되어 온 건 사실이지만, 만명도 대중이고 천만명도 대중이다. 영화는 대중을 위한 예술이란 걸 심화시키려 노력했던 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감독으로서 지금 하고 싶은 영화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사랑에 대한 영화를 찍어왔다. 직접 ‘사랑’을 다루거나, 사랑의 다른 면인 ‘욕망’을 비추는 영화. 이젠 종교를 통해 사랑을 나타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궁극적인 지향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나의 장비는 이성과 감성, 지식과 경험에 있다. 그리고 내 체력. 이것들이 녹슬지 않는 한 계속 영화를 하고 싶다.
 

영화산업 전반이 불황이다. 타개책이 있다면.
“달리는 바퀴를 잠시 멈춰야 한다. 제작비가 너무 올랐다. 극장, 산업, 영화계 종사자 등 모두가 힘들다. 기계적인 (흥행용) 영화보다는 진짜 생명력 있는 영화를 만드는 환경이 돼야 한다. 독립영화는 국가의 지원을 늘리고, 상업영화 또한 위험분산을 줄여 200억 한 편 대신 20억 열 편을 만드는 등, 작은 기획들을 통해 젊은 감독들의 독특한 창작력을 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