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페루선 성인이라 불렸다" [레오 14세 교황]

가톨릭 2000년 역사상 최초로 미국 출신의 교황이 탄생했다. 8일(현지시간) 로마 교황청은 제 267대 교황으로 미국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 추기경이 선출됐다고 밝혔다. 앞으로 쓸 교황 즉위명은 '레오 14세(Leo XIV)'다. 라틴어로 '사자'를 뜻하는 레오는 강인함과 용기, 리더십을 상징한다. 

이날 레오 14세는 첫 강복 메시지에서 평화를 빌었다. 레오 14세는 선출 직후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의 '강복의 발코니'로 나와 이탈리아어로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La pace sia con tutti voi)"이라고 말했다. 첫 미국 출신 교황이지만 이날 강복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로 진행됐고 라틴어로 마무리됐다. 영어는 쓰지 않았다.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14세가 8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AP=연합뉴스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14세가 8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AP=연합뉴스

레오 14세는 1955년 9월 14일 미국 시카고에서 나고 자랐다. 프랑스·이탈리아계 미국인인 아버지 루이스와 스페인계인 어머니 밀드리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에서 복무했고, 그후 교육자로 일하면서 가톨릭 교리교사도 맡을 만큼 독실했다.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였으며, 교황의 두 이모가 수녀였다고 시카고선타임스는 전했다. 교황에겐 친형제가 두 명 있다. 미 언론은 "그는 음악과 독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고 전했다. 

그는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앞두고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와의 인터뷰에서 "조부모님은 모두 이민자였고, 나는 가톨릭 가풍이 짙은 가정에서 자랐다"며 "부모님 모두 교구 일에 많이 관여하셨다"고 소개했다. 가족 배경 덕에 영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레오 14세는 시카고 가톨릭신학연합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또 신학과 별개로 펜실베이니아주 빌라노바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시카고선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한 때 시카고의 멘델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수학을 가르친 적도 있다고 한다. 


27세 때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난 그는 교황청립 안젤리쿰대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인 그는 8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 교황을 배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교황 레오 14세가 추기경일 당시 2024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교황 레오 14세가 추기경일 당시 2024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페루에서 20년간 사목, 국적 취득도

미국 국적이지만 20년간 페루에서 사목하면서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2015년엔 페루 시민권도 땄다. 현지 매체는 페루 당국을 인용해 "(교황이) 치클라요에서 페루 국적을 취득했으며, 유효한 시민권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페루에서 교구장으로 사목하는 데 필요한 요건으로, 교황청과 페루 간 협약에 따른 것이다. 

2015∼2023년 치클라요 교구장을 지냈다. 그는 첫 강복 메시지를 통해 스페인어로 "허락하신다면, 사랑하는 치클라요 교구에 특별히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2020년부터는 페루 카야오 지역도 같이 맡았는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치클라요에서 약 700㎞ 떨어진 이곳을 직접 운전해 오가며 수시로 신자들을 살폈다고 치클라요 교구는 전했다. 식량과 모포 등을 실은 흰색 픽업트럭을 몰고 안데스산맥 오지의 마을들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AFP통신은 "온화한 말투의 미국인이 페루에서 수십년간 빈민들을 돌봤다"고 했다. 

페루 출신의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수사 알렉산더 램은 레오 14세가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사회정의 구현과 환경 보호에 앞장서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전했다. 램 수사는 "페루의 (다른) 주교들조차 그를 성인이라고, 북쪽의 성인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실비아 발베르데가 2025년 5월 8일 페루 치클라요 산타마리아 대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후 당시 치클라요 교구장이었던 교황 레오 14세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AP=연합뉴스

실비아 발베르데가 2025년 5월 8일 페루 치클라요 산타마리아 대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후 당시 치클라요 교구장이었던 교황 레오 14세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AP=연합뉴스

 
페루에서 그와 10년간 룸메이트로 지낸 존 레이던 신부는 CBS뉴스에 "그는 훌륭한 요리사였고, 특히 피자를 아주 잘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인이면서도 페루 빈민가 등 변방에서 사목한 그의 발자취가 교황 선출의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초강대국인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가톨릭 전반엔 미국인 출신 교황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도 바티칸 소식통을 인용해 "레오 14세는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이라고 짚었다.

가난한 이들과 이민자들을 포용하는 모습이 선대 프란치스코 교황과 닮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레오 14세는 지난해 10월 바티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주교는 자신만의 왕국에 머무는 작은 왕자여선 안 된다"며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걷고, 고난을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레오 14세는 발언이 온화한 인물이며 성직자로 일하던 기간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왔다"고 전했다. ABC방송은 "매우 현실적이고, 친절하지만 내성적인 사람"이란 주위 평가를 전했다. 

과거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테니스 치기를 즐기며 페루에 있는 동안 현지 축구팀을 응원하기도 했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오랜 팬이다. 

신임 교황 레오 14세(왼쪽)가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났을 때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신임 교황 레오 14세(왼쪽)가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났을 때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레오 14세는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 주교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교황청 주교부는 신임 주교 선발을 관리·감독하는 조직으로, 교황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조직이다.  

그는 특히 주교 후보자 명단을 결정하는 투표단에 여성 3명을 처음 포함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조치를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와 관련, 레오 14세는 과거 인터뷰에서 "다양한 상황에서 그분들(여성)의 시각이 우리를 풍성하게 해줬다"고 말했다. 

2024년 페루 출루카나스를 방문했던 교황. 미국 출신인 그는 2015년 페루 국적을 취득했고 20년 넘게 페루에서 활동했다. AFP=연합뉴스

2024년 페루 출루카나스를 방문했던 교황. 미국 출신인 그는 2015년 페루 국적을 취득했고 20년 넘게 페루에서 활동했다. AFP=연합뉴스

진보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이지만, 레오 14세는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이다. 이 때문에 교회 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인물로 평가된다. 실제로 그는 교회의 분열에 대해 "그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리 주교들은 특히 통합을 향한 움직임을 강화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향해야 한다"고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거 인터뷰에선 젊은 시절 인간적인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런 (성직자의) 삶에서 벗어나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보통의 삶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트럼프 반이민 정책에 반대 소신도  

대체로 온건한 인터뷰 발언과는 달리 과거 소셜미디어(SNS)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소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추기경 시절 이용한 X(옛 트위터) 계정을 보면 트럼프 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공유한 흔적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월에는 JD 밴스 부통령을 비판하는 가톨릭 매체의 기사를 공유하기도 했다. 해당 기사의 제목은 "JD 밴스가 틀렸다. 예수는 타인에 대한 사랑에 등급을 매기라고 하지 않았다"였다. 당시 밴스 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가족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 이웃을, 그 다음에 공동체를, 그 다음에 동료시민을 사랑하라. 그러고 나서야 나머지 세계에 우선권을 두라"는 말을 기독교 교리라고 거론해 비판을 받았다. 

이 기사를 공유하기 전까지 레오 14세는 약 2년간 X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다. 2017년엔 당시 대권에 도전하던 트럼프에 대해 한 추기경이 기고한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을 공유했는데, 이 역시 트럼프의 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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