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패스트트랙 막히자 기업인 APEC 카드 발급 급증…"해외 업무 불편"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붐비는 일반 출국장(오른쪽)과 달리 한적한 교통약자 및 사회적 기여자 출국 우대출구(패스트트랙) 모습. 오삼권 기자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붐비는 일반 출국장(오른쪽)과 달리 한적한 교통약자 및 사회적 기여자 출국 우대출구(패스트트랙) 모습. 오삼권 기자

“이제는 기업 활동도 정부 역할만큼 중요해졌잖아요. 공무가 아니더라도 필요한 경우엔 빠르게 출입국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61세 정옥정씨)

“항공 안전을 위해서 모두가 보안 검색 순서를 기다리는 거잖아요. 누군가 돈을 많이 냈거나 중요한 업무를 한다는 이유로 먼저 들어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아요.” (28세 김진수씨)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 이른 아침부터 비행기를 타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보안 검색 순서를 기다리는 탑승객이 출국장 입구까지 장사진을 이뤘다. 반면, 바로 옆에 마련된 교통약자 및 사회적 기여자를 위한 출국 우대 출구(패스트트랙)는 찾는 이가 없어 한적했다. 패스트트랙 전용 출구인 1번·6번 출국장은 아예 폐쇄된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이 패스트트랙을 이용할 수 있는 유료 서비스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부는 국민 정서를 이유로 난색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국토교통부가 최근 공무 외 목적의 빠른 출입국을 사실상 금지하자 이용객 사이에서 불편이 커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교통약자 및 사회적 기여자 전용 출국 우대출구(패스트트랙)인 1번 출국장이 폐쇄된 모습. 오삼권 기자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교통약자 및 사회적 기여자 전용 출국 우대출구(패스트트랙)인 1번 출국장이 폐쇄된 모습. 오삼권 기자

국토부와 서울지방항공청은 지난 1월 인천국제공항공사에 공무 목적이 아니라면 기업인의 패트스트랙 전용 출구 사용을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공사는 항공사 등에 “최근 출국장 전용 출입문 사용 절차를 지키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는 등 관리 강화 필요성이 커졌다”라며 “공사가 공무 목적 확인 후 사용서를 발급하는 ‘공사 사전확인’ 절차를 신설한다”라고 통지했다. 항공사가 일등석 이용객 등에 제공하던 패스트트랙 서비스를 사실상 금지한 것이다.

패스트트랙이 막힌 기업인들은 일부 국가에서라도 신속하게 출입국하기 위해 부랴부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기업인 여행카드(ABTC)를 발급하고 있다. ABTC는 21개 APEC 회원국 간 경제 교류를 늘리기 1997년 도입된 제도로 기업인의 신속한 출입국을 상호 보장한다. 중앙일보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법무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ABTC 발급 건수는 2022년 9422건에서 지난해 2만9760건으로 2년 새 약 3배로 증가했다. 올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ABTC는 연간 수출액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 이상의 무역업체 등 기업요건과 2년간 ABTC 회원국 4회 이상 방문 등 개인요건을 모두 만족한 사람에게 발급된다. 임직원 규모에 따라 기업별 최대 발급 인원이 달라진다.   


지난 3월 오후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수출 야적장에 수출용 차량등이 주차돼 있는 모습. 뉴스1

지난 3월 오후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수출 야적장에 수출용 차량등이 주차돼 있는 모습. 뉴스1

재계에서는 원활한 해외 사업을 위해 신속한 출입국 제도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내 한 종합상사에서 법무 업무를 맡고 있는 A전무는 “최근 동남아 출장 때 ABTC를 통해 출입국 시간을 각각 30분~1시간씩 아꼈다”라며 “그만큼 현지 체류 시간을 늘려 더 많은 사업 논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중동·남미 등에서는 ABTC를 활용할 수 없다. 관세전쟁으로 글로벌 통상환경이 급변하는 시기에 해외 업무에 불편이 생겼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인천국제공항공사도 공항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패스트트랙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전 세계 이용객 순위 상위 30위 공항 가운데 유료 패스트트랙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곳은 인천공항이 유일하다. 이학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지난 3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패스트트랙 도입이 인천공항이 세계 1위 공항 지위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패스트트랙은 국익을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반면, 정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영혜 국토부 항공정책과장은 “공항이라는 시설 자체가 공공재의 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이용객 차별은 신중해야 한다는 기존 정부 입장에 변함이 없다”라며 “공항의 혼잡을 줄여 모든 이용객이 빠르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수용이 먼저라고 지적한다. 윤문길 한국항공대 경영학부 명예교수는 “산업 경쟁력과 소비자 편익을 고려했을 때 패스트트랙은 필요하다”라면서도 “인천공항은 해외 공항보다 수속 절차가 빨라 일반 승객은 패스트트랙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서비스가 필요한 이유를 국민께 충분히 설명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