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쪽 한번 맛보면…" 조선업 호황인데 등돌린 韓숙련공 [조선도시 두얼굴下]

내국인 근로자들이 경기도 한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2023년 6월 모습. 김성룡 기자

내국인 근로자들이 경기도 한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2023년 6월 모습. 김성룡 기자

 
“조선업 호황, 5년? 6년? 얼마나 갈까요. 또 불황이 오면….”

경기도 한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배관 용접사 박수용(40대·가명)씨의 말이다. 조선소 근로자였던 박씨는 ‘호황인데 조선소로 돌아갈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처럼 주저했다. 조선업 불황 때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뼈아픈 경험이 있어서다.

박씨는 원래 경남 거제시 한 대형 조선소에서 용접을 했다. 2012년부터 10년간 일했다. 하지만 박씨 소속 사내협력사는 긴 불황 끝에 폐업했다. 먼저 구조조정·폐업으로 조선소를 떠나 반도체 공장으로 간 동료들 소개로, 박씨는 3년 전 이곳에 왔다.

‘불황 실직 트라우마’…“고용불안에 벌이도 지금이 낫다”

수주 절벽으로 최악 불황기였던 2016년 경남 거제시 한 인력시장에 일감을 잃은 조선소 직원들이 몰려든 모습. 송봉근 기자

수주 절벽으로 최악 불황기였던 2016년 경남 거제시 한 인력시장에 일감을 잃은 조선소 직원들이 몰려든 모습. 송봉근 기자

박씨는 “지금이 덜 힘든데 더 번다”고 했다. 이어 “현재 월 수입은 500만~600만원이다. 하지만 조선소에서 가면 업무량은 늘고 돈은 덜 번다”는 게 박씨 생각이다. 조선소가 이곳보다 ‘공수’를 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공수는 일당(日當)을 뜻하는 현장 용어다. 기본 근무시간(8시간)을 채우면 1공수이고, 잔업 시간에 따라 0.5~1공수가 추가된다. 일당 25만원에 1.5공수이면 1.5배인 37만5000원을 받는 식이다. 박씨는 “조선소는 오후 9시 반까지 해야 1.5공수인데, 여긴 7시까지만 해도 1.5공수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낫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경남·울산 대형 조선소와 경기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이하 반도체 공장)을 경험한 5명을 밀착 취재한 결과, 옛 조선소 근로자들이 호황기에도 조선소 복귀를 꺼린 이유로 ▶고용불안 ▶저임금·고강도 업무가 꼽혔다. 앞서 불황기 용접사와 같은 기술 인력은 대거 경기 반도체 공장으로 넘어갔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조선·건설업계에 따르면 현재 두 현장 임금(용접사 기준) 격차는 월평균 100만원 수준이다. 반도체 공장은 세후 500만~600만원, 조선소는 400만~500만원 정도다. 일당 기준으로 봐도, 조선소는 평균 15만~25만원인데 반도체 공장은 21만~25만원이다. 평균 근무 일수는 반도체 공장(주 5일)이 조선소(주 6일)보다 하루 적다.

 
열악하고 위험한 조선소 작업 환경도 복귀를 꺼리게 한다. 조선소, 반도체·화학 공장 건설 현장을 거쳐 경기도에 용접학원을 차린 신기호(50대·가명)씨는 “조선소는 일도 고되고 작업 환경마저 열악하지만, 반도체는 상대적으로 환경이 깨끗하고 안전하다”며 “일이 많을 땐 월 1000만원까지 버는데, 반도체 쪽 한 번 맛본 사람은 절대 조선소로 못 간다”고 말했다.

“작업환경 위험하고 열악해”  

조선소에서 용접 작업이 이뤄지는 모습. 중앙포토

조선소에서 용접 작업이 이뤄지는 모습. 중앙포토

조선소 근로자 였던 김한솔(40대·가명)씨는 “용접은 불활성 가스(질소, 아르곤 등)를 쓰는데 환기가 안 되면 질식 위험이 있다”며 “반도체는 조선소와 달리 밀폐된 곳에서 작업할 일이 없어 위험이 덜하다”고 했다. 또 “고소작업(高所作業)도 반도체는 높아 봐야 공장 층고(層高) 수준인 몇 미터(m)밖에 안 되지만, 대형 선박이나 해양 플랜트 구조물은 수십 미터에 이르는 곳이 있어 심적 부담이 크다”고 했다.

고용노동부의 지난해 산업재해현황을 보면, 조선업(선박 건조 및 수리업) 재해율은 2.63%로 전체 제조업(0.8%)의 3배 수준이다. 1.65%인 건설업과 비교해도 약 1.6배 높다. 재해율은 근로자 100명당 재해자 수 비율이다. 고소·밀폐·화기 작업이 많아 사고가 잦은 조선업에서 지난 한 해만 54명이 산업재해로 숨졌다.

그럼에도 임금·고용불안 등 근로 환경이 개선되면 조선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도 있다. 과거 거제 대형 조선소에서 ‘용접 명장’ 칭호까지 받았던 베테랑 용접사 이상호(60대·가명)씨가 그런 경우다. 이씨는 1998년 조선소에 들어와 22년간 일하다, 불황으로 회사가 문을 닫자 조선소를 떠났다.

경남 거제시 한 대형 조선소 사내협력사에서 베테랑 용접사로 일할 당시 이상호(가명)씨가 받은 '명장' 상패. 사진 이상호(가명)씨

경남 거제시 한 대형 조선소 사내협력사에서 베테랑 용접사로 일할 당시 이상호(가명)씨가 받은 '명장' 상패. 사진 이상호(가명)씨

이씨는 “경기도에 또 착공 중인 현장도 있고, 경기와 가까운 충남 당진·천안에 화학·디스플레이 공장 등 일거리가 계속 있다”면서도 “거제에 아직 아내와 집이 있어, 고용 불안이나 임금 등이 나아지면 다시 돌아갈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국책연구기관 “국내 인력 수급하려면 임금 상승 필요해”

산업연구원(KIET)이 지난해 5월에 낸 ‘조선산업 핵심인력 유지를 위한 대응방안 연구’에 따르면, 조선업 전체 종사자 수는 2015년 15만8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6년 선박 수주 절벽 등으로 급감했다. 사내협력사 생산직 위주로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매년 1만~2만명씩 실직, 2020년엔 9만6000명까지 줄었다.

연구진은 “(조선업) 수주가 21년을 기점으로 회복돼 인력 수요가 급증했으나 조선업이 타 업종 대비 낮은 임금 경쟁력과 높은 업무 강도로 국내 인력 수급에 난항을 겪고 있다”며 “원활한 인력 수급을 위해 추가적인 임금 상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거제 대형 조선소 사내협력사 관계자도 “원청에서 직원을 더 뽑거나 사내협력사에 주는 기성금을 높여 임금이라도 많이 주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고 했다.

국내 조선업에서 발생한 중대재해 사례. 자료 고용노동부

국내 조선업에서 발생한 중대재해 사례. 자료 고용노동부

업계 “‘中 가성비’와 경쟁…무작정 임금 인상 어려워”

하지만 조선업계는 임금 인상을 주저한다. 익명을 원한 대형 조선소 관계자는 “원자재부터 인건비 등 제조 원가에서 20% 정도 저렴한 중국의 가성비 조선업과 경쟁하는데, 당장 우리 임금을 올리면 가격도 올라가 수주가 안 된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노동 강도는 높고 쉬운 일은 외국인, 강도는 약하지만 어려운 일은 내국인이 맞는 등 인력 혼합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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