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0일 단식을 시작했다. 그는 이날 오후 3시쯤 자신이 지난 9월 삭발했던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 등장했다. “절체절명의 국가위기를 막기 위해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하겠다. 죽기를 각오하겠다”면서다. “소아(小我)의 마지막 자취까지 버리려한다. 나에겐 자유민주세력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싶은 소명의식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이때 서울의 낮 기온은 5℃였다. 황 대표는 “이 순간 추위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원래 계획과 달리 단식 장소를 국회로 옮겨야 했다. 청와대 앞 분수대에 천막을 치고 밤샘 농성하는 게 규정 위반이라서다. 황 대표는 이날 오후 8시30분쯤 청와대를 떠나 국회 본관 앞으로 갔다.
①요구사항은
황 대표는 “지소미아를 폐기하면 경제 갈등이 안보 갈등으로 뒤바뀌어 일본과 미국이 가세한 경제·안보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일터와 기업, 해외투자자들을 요동치게 할 것”이라며 “그 충격은 우리 가정의 현관문을 열고, 우리 안방까지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을 두고는 “힘있는 자를 벌주는 선의(善意)의 법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에 반대하는자들을 탈탈 털어 감옥에 넣겠다는 악법(惡法) 중의 악법, 좌파독재법”이라고 했다. 선거법 개정안에 대해선 “한국당의 유불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이 정권과 야합한 세력들의 연합이 국회를 장악하고 개헌선(200석)까지 확보하는 걸 어떻게 어떻게 두고볼 수가 있나”라고 했다.
②왜?
“단식을 해. 단식을.”(원유철 의원)
“누가? 당 대표가? 어디서?”(정진석 의원)
이른바 정치권의 '선수'로 불리는 이들은 ‘리더십 위기’ 돌파용으로 해석하곤 한다. “위기를 단식으로 극복하려고 해도 국민이 감동하지 않는다”(박지원 대안신당 의원)는 비판이 그 예다. 실제 황 대표는 최근 박찬주 전 육군대장을 영입하려다 당 안팎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고, 이후 공언한 보수통합도 지지부진해 리더십 위기를 겪어왔다. 지난 17일 이후에는 이른바 ‘김세연 후폭풍’까지 맞았다.
더욱이 황 대표는 9월 ‘삭발’로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다. 당시 조국 정국에서 ①검찰 압수수색 ②기자간담회 및 인사청문회 ③장관 임명 등 결정적 국면에서 실기(失期)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삭발 이후 야권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가 있었다.
황 대표를 아는 이들은 그러나 “기존 정치문법으론 설명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목하는 단어가 ‘소명의식’이다. 사전적으론 ‘부여된 어떤 명령을 꼭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 있는 의식’이란 의미지만 종교적으론 그보다 더욱 강력한 의지 상태를 말한다.
③누가 결정했나
황 대표는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정치공학적인 이유로 단식하려는 게 아니다. 지소미아 종료 등은 국익을 해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며 단식 강행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또 다른 관계자는 “황 대표가 18일부터 단식 식이요법을 하고 있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④언제까지 하나
황 대표는 “언제까지 단식을 하려느냐”는 측근들을 향해 “실려서 나가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하겠다”고 한 황 대표는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목숨을 건다”는 표현도 두 차례 썼다. 3가지 요구사항이 관철되기 전까지는 단식을 접지 않겠다는 의미다.
황 대표는 이날 오후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집회 현장을 찾아 잠시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여당이 황 대표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공수처법과 이에 연동된 선거법 처리는 정부·여당이 올 한해 국회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왔던 법안들이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이 오후 단식 중인 황 대표를 찾은 뒤 기자들과 만나 전한 청와대 분위기도 부정적이다. ‘문 대통령이 황 대표 단식에 어떤 반응을 보였냐’는 질문에 강 수석은 “지소미아 문제는 북핵 관련 문제기 때문에 힘을 모아야지 단식을 하는 건 옳은 방향이 아닌 것 같다는 말씀(을 했다)”고 했다. 또 공수처법·선거법 과 관련해서도 “패스트트랙 법안을 청와대에서 중지시키고 할 수가 없는 것 아니냐. 국회에서 대화해 보고 참여해야 된다면 저희(청와대)도 참여하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한국당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을 얕잡아보고 있는데 단식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홍준표 전 대표)라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이 바른미래당 일부, 대안신당·정의당·민주평화당과 합의안을 만들어내지 못해 이들 법안이 본회의서 처리되지 못할 가능성은 있다.
⑤야당 대표들의 단식
최근 단식은 그만한 ‘명분 있는 결과’를 얻진 못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단식이 그랬다. 요즘엔 “단식을 시작하긴 쉬워도 (명분을 갖고) 끝내긴 어렵다”고들 말한다.
⑥다른 정당들의 반응은
한국당을 제외한 정당에서는 일제히 황 대표 단식을 혹평했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황 대표의 단식은 정치 초보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명분이 없음을 넘어 민폐”라고 비판했다. 최도자 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도 “명분도 당위성도 없다. (황 대표가) 자신의 리더십 위기에 정부를 걸고넘어져서 해결하려는 심산을 국민들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단식 사유가 앞뒤가 맞지 않고 타이밍도 뜬금없다. 곡기를 끊지 말고 정치를 끊기를 권한다”(여영국 정의당 원내대변인),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스스로 부정하고 대권 가도만 생각하는 소아병적인 행태”(박주현 민주평화당 수석대변인),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드러눕는 것은 생떼이고 정치 지도자가 할 일이 아니다”(김정현 대안신당 대변인)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인지 황 대표의 단식 호소문에는 반성의 메시지가 담겼다. “저와 한국당이 부족했던 지점들을 반성하고, 통합과 쇄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단식 과정마다 성찰하고 방법을 찾겠다”는 내용이다. 또 “대통합 외에는 어떤 대안도 우회로도 없다”며 야권 결집을 호소하는 한편, “당을 쇄신하라는 명령을 받들기 위해 저에게 부여된 칼을 들겠다”는 말도 남겼다.
한영익·김준영·성지원 기자 hany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