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부인부터 오렌지족까지…서울의 대표적 멋쟁이는 누구?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요즈음 멋장이로 차리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 중에머리꼴을 꼭 거지들 모양으로 다듬지도 않고 뒤로 넘겨뜨려얼핏보면 이발을 몇달 동안 안 한 남자 모양으로 하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도 '멋' 속에 낍니까?"
"헵번 스타일'에서 분리파생된더벙머리 스타일입니다…개성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니 너무 그러한 여성을 멸시하지는 마시오." 

1955년 5월 14일 경향신문에 문답식으로 게재된 '경향쌀롱'이라는 코너 중 일부다.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50년대 전쟁구호품을 입은 소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50년대 전쟁구호품을 입은 소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6·25 전쟁에서 민간으로 흘러나온 군복과 구호품을 입는 가난 속에서도 서울 사람들의 패션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종전과 함께 명동의 양장점을 중심으로 '서울 패션'이 시작됐다. 서양에서 들어온 패션, '양장'의 바람은 서울 거리의 풍경을 크게 바꿔놓기 시작했다. '마카오 신사'와 '자유부인'으로 상징되는 서울 멋쟁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한국 동난을 전후해서 호사스런한복으로수저고리 '벨베트'치마가 유행했다. 젊은 여자들이 전차나 버스에서 '벨베트' 치맛자락을 번쩍치겨들고 앉아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56년께에는 소위 '헵번 스타일'의 '쇼트· 헤어'에 '맘보'바지가 나타나서 남녀를 구별하기가 힘든 때가있기도 했다"라는 중앙일보(1968년 8월 13일자) 기사는 당시 서울의 이런 모습을 잘 드러낸다.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정부에서 대대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간편한 양장 생활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개량 한복과 재건복을 입는 신생활 재건 운동이펼쳐지면서 의복이 간소화되고, 양장이 일상화됐다. 


잠시 움츠러든 패션의 혁신이 재개된 것은 1970년대다. 제2차 경제개발이 성공하면서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등 경제적 풍요를 만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제 성장 속에서 자란 대학생들이 1970년대 청년문화와 패션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시작으로 신촌, 관철동 등 유명한 학사주점에서는 청년들의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중매체를 통해 해외 패션정보를 파악한 이들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장발 머리에 통기타음악과 청바지, 미니스커트를 소화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명랑하고 건전한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장발족의 방송 출연 금지,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경범죄 처벌, 고고클럽 영업 정지 등의 조치가 시행되면서 청년 문화는 쇠퇴했다.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서울 명동의 양장점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서울 명동의 양장점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970년대 장발족 단속에 적발된 시민들 [중앙포토]

1970년대 장발족 단속에 적발된 시민들 [중앙포토]

 
1981년 시작된 컬러 TV 방송은 서울의 모습을 바꾸는 분기점을 만들었다. 옷의 정보를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일반인들도 옷과 액세서리까지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특히 1983년에 시행된 교복 자율화 정책은 '영패션'이라는 10대 중심의 새로운 시장도 새롭게 형성시켰다. 
대학가와 명동에서는 유니섹스 웨어를 판매하는 패션 전문점도 생겨났고,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건강과 여가생활이 중시되면서 기능성 스포츠 웨어와 레저용품 수요도 급증했다.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80년대 발달하기 시작한 영패션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80년대 발달하기 시작한 영패션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그러나 K패션의 틀을 완성한 것은 1990년대다. 'X세대'로 불리는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가 나타났고, 듀스·김건모 등이 유행시킨 힙합 패션이 거리를 휩쓸었다. '오렌지족'으로 불리며 해외 고급 브랜드 소비를 주도한 젊은 층도 나타났다. 이런 움직임 속에 서울 곳곳에 패션 중심지들이 자리 잡으면서 다양한 패션 문화가 정착됐다. 10~20대 중심의 중저가 패션의 본거지 명동, 고급패션의 중심지 압구정동과 청담동, 패션 도매시장인 동대문, 대학의 특성이 반영된 패션문화가 있는 이대와 홍대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큰 인기를 얻은 2인조 댄싱그룹 듀스 - 고 김성재, 이현도 [중앙포토]

1990년대 큰 인기를 얻은 2인조 댄싱그룹 듀스 - 고 김성재, 이현도 [중앙포토]

"카페거리, 오렌지거리로 불리는 홍익대 앞 상권이 신세대 패션광장으로 변하고 있다…이들 매장에서 판매하는 의류 등은 '남과 같은 모습은 싫다'는 요즘젊은 층들의 기호에 맞게 다양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치장할 수 있는 토털제품들이 주류인데 10만원이나 하는 여성용 팬티가 있는가 하면 8000원이면 살 수 있는 티셔츠도 있다. 100만원을 넘는 재킷, 20만원을 웃도는 청바지 등 고급 의류와 3000원짜리신발·모자 등 대중적인 소품이 공유하면서 독특한 디자인을 겨루는 경연장(?)이 이곳 패션거리다." (중앙일보 1995년 4월 21일)

서울 패션의 중심지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 패션의 중심지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은 3월 27일까지 '서울 멋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내용의 기획전시전을 연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패션은 개인적 취향과 시대의 유행, 즉 사회적 시선도 담고 있다.” 며, “이번 전시를 통해 서울사람들의 일상적이면서 사회적인 패션을 돌아보면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