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678581be-71a9-4c2c-bc3b-e2fa5b6b4f4e.jpg)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헵번 스타일'에서 분리파생된더벙머리 스타일입니다…개성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니 너무 그러한 여성을 멸시하지는 마시오."
1955년 5월 14일 경향신문에 문답식으로 게재된 '경향쌀롱'이라는 코너 중 일부다.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50년대 전쟁구호품을 입은 소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4b762773-df3c-4cd0-8e1e-e9f852441182.jpg)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50년대 전쟁구호품을 입은 소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한국 동난을 전후해서 호사스런한복으로수저고리 '벨베트'치마가 유행했다. 젊은 여자들이 전차나 버스에서 '벨베트' 치맛자락을 번쩍치겨들고 앉아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56년께에는 소위 '헵번 스타일'의 '쇼트· 헤어'에 '맘보'바지가 나타나서 남녀를 구별하기가 힘든 때가있기도 했다"라는 중앙일보(1968년 8월 13일자) 기사는 당시 서울의 이런 모습을 잘 드러낸다.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12af3fab-430d-473e-b1ef-848d3f540c83.jpg)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2de21d2d-15e1-4b98-b9d3-e72c26f3b11f.jpg)
1950년대 멋쟁이. 사진작가 신상우씨가 잡지 '신태양'의 사진촬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사진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4395c39a-2170-4d6a-81a3-88eb2161b90f.jpg)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잠시 움츠러든 패션의 혁신이 재개된 것은 1970년대다. 제2차 경제개발이 성공하면서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등 경제적 풍요를 만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제 성장 속에서 자란 대학생들이 1970년대 청년문화와 패션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시작으로 신촌, 관철동 등 유명한 학사주점에서는 청년들의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중매체를 통해 해외 패션정보를 파악한 이들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장발 머리에 통기타음악과 청바지, 미니스커트를 소화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명랑하고 건전한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장발족의 방송 출연 금지,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경범죄 처벌, 고고클럽 영업 정지 등의 조치가 시행되면서 청년 문화는 쇠퇴했다.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서울 명동의 양장점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5279cdc3-7f29-4894-8b12-4c993123e94a.jpg)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서울 명동의 양장점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970년대 장발족 단속에 적발된 시민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80683895-52aa-4464-b116-d9615b6e2824.jpg)
1970년대 장발족 단속에 적발된 시민들 [중앙포토]
1981년 시작된 컬러 TV 방송은 서울의 모습을 바꾸는 분기점을 만들었다. 옷의 정보를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일반인들도 옷과 액세서리까지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특히 1983년에 시행된 교복 자율화 정책은 '영패션'이라는 10대 중심의 새로운 시장도 새롭게 형성시켰다.
대학가와 명동에서는 유니섹스 웨어를 판매하는 패션 전문점도 생겨났고,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건강과 여가생활이 중시되면서 기능성 스포츠 웨어와 레저용품 수요도 급증했다.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80년대 발달하기 시작한 영패션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9728e513-bac7-420e-9c36-22c441ce1c06.jpg)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1980년대 발달하기 시작한 영패션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0480c702-3769-4503-9869-d93306a91976.jpg)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서울 멋쟁이'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그러나 K패션의 틀을 완성한 것은 1990년대다. 'X세대'로 불리는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가 나타났고, 듀스·김건모 등이 유행시킨 힙합 패션이 거리를 휩쓸었다. '오렌지족'으로 불리며 해외 고급 브랜드 소비를 주도한 젊은 층도 나타났다. 이런 움직임 속에 서울 곳곳에 패션 중심지들이 자리 잡으면서 다양한 패션 문화가 정착됐다. 10~20대 중심의 중저가 패션의 본거지 명동, 고급패션의 중심지 압구정동과 청담동, 패션 도매시장인 동대문, 대학의 특성이 반영된 패션문화가 있는 이대와 홍대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큰 인기를 얻은 2인조 댄싱그룹 듀스 - 고 김성재, 이현도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f400cfae-4556-4ea2-9af8-2db4eb4db9a9.jpg)
1990년대 큰 인기를 얻은 2인조 댄싱그룹 듀스 - 고 김성재, 이현도 [중앙포토]
![서울 패션의 중심지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2/08/5988ff64-0953-4780-b38c-c136b6aaeb20.jpg)
서울 패션의 중심지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