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주력으로 사용하다
무기의 진정한 성능은 실전을 통해 확인된다. 예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이기도 한다.

키이우 외곽에서 격파된 러시아군 기갑부대의 잔해. 예상보다 쉽게 격파당하면서 소련(러시아)제 전차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AP=연합뉴스
예를 들어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전에서 재블린, NLAW 등은 대전차미사일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반면 지상전의 왕자인 전차는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 모두 옛 소련에 속했던 나라여서 같은 계열의 전차로 싸우는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전후 T-55를 필두로 해서 최고라고 선전하는 전차들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이는 냉전 당시 서방에게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이번에 드러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익숙한 지형의 이점을 누리고 방어에 주력하는 우크라이나군보다 공세를 벌이는 러시아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고 해도 그동안 강력하다고 여겨지던 소련(러시아)제 전차에 대한 관념이 여지없이 깨진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운용을 잘못한 탓이 가장 크지만, 이는 오랫동안 내재 된 소련제 전차의 여러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이번 전쟁에 양측이 동원한 전차는 T-64, T-72, T-80, T-90인데, 러시아는 이중 T-72, T-80, T-90을 사용 중이다.
성능 차이가 크지 않다면 전차의 종류는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것이 좋다.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전차로 벌이는 모든 임무를 이른바 MBT(주력전차) 한 종류로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군은 그렇지 않다. M1 에이브럼스 하나만 사용하는 미군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계기는 T-64와 관련이 많다. 1950년대 말에 소련은 기존 전차와 차원이 다른 신예 전차 개발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T-64인데, 당시 기술로는 요구된 성능을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개발이 지연되자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존 전차를 개량한 T-62를 시급히 만들어 사용했을 정도였다.

T-64는 구상 당시에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의 전차였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달성하기에는 기술력이 부족해서 개발에 난항을 겪었다. 이는 소련이 여러 종류의 주력전차를 운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면서 효율적인 전력 재편에 실패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위키피디아
그렇게 시간을 얻어 T-64는 개발을 마쳤으나 배치 이후에도 엔진 계통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에 T-62 차체를 개량하고 여기에 T-64의 공격력을 결합한 후속작을 만들었는데 의외로 호평을 받아 T-72라는 이름으로 배치가 이루어졌고 그사이에 T-64도 문제를 해결했다. 결국 1970년대 소련은 T-62, T-64, T-72 모두를 주력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때 교통정리가 한번 이루어졌어야 했다.
체질 개선에 실패한 결과
보통 후속작이 등장하면 전작의 생산을 중단하고 순차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 그러나 소련은 동시에 여러 종류의 전차를 만들고 운용했다. 고가의 고성능 무기와 염가의 저사양 무기를 혼합하는 하이로믹스(High-Low Mix)도 아니었다.

최초에 T-80은 기존 T-62, T-64, T-72를 모두 대체할 예정이었을 만큼 소련이 기대를 많이 했던 전차다. 하지만 체제가 붕괴되면서 주요 생산처가 우크라이나로 귀속되자 러시아는 T-72를 개량한 T-90을 주력으로 삼았다. 위키피디아
이런 비효율적인 모습이 나타난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전차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 군부의 안이함과 자본주의 기업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치열했던 전차 설계국 간의 경쟁 때문이었다.
경쟁은 품질 좋은 제품을 획득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나 설계국들의 다툼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기득권 유지와 생산량 확보만 중시한 데다 이를 지키기 위해 권력층과 부화뇌동하면서 모든 전차를 만들고 사용하는 비효율이 나타난 것이었다.
말과 달리 혁신은 뒷전이었다. 덕분에 소련군은 서방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양의 전차를 만들고 보유했어도 실제로 개별 전차의 성능은 선전과 달랐다.
그런 상태에서 위상이 어정쩡해진 T-64를 살리기 위한 개량형이 등장했는데 성능이 생각보다 좋았다. 그래서 T-80으로 명명하고 이를 이용해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주력전차 단일화를 시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T-80의 주요 생산처인 모로조프 설계국이 우크라이나로 귀속되자 러시아는 T-72를 개량한 T-90을 주력으로 선정했다. 소련 시절처럼 대규모 군비 투자가 불가능하자 땜질식 전력 증강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T-90의 생산마저 지지부진해서 도태된 T-62, T-64를 제외한 모든 전차를 30년째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 21세기 들어 개발한 T-14의 양산도 이런저런 이유로 중단되었다.
결국 러시아의 전차 전력은 시대 흐름을 제대로 반영한 전력 증강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다. 그 결과 이번 전쟁에 동원된 여러 종류의 전차가 실전에서 그다지 성능 차이가 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실전 배치된 러시아 최고의 전차인 T-90M도 대전차포의 공격에 허무하게 격파되었다. 기존 전차를 개량하는 방식으로는 획기적으로 성능을 향상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트위터
최근에 만든 전차가 구형 전차보다 나은 전과를 올리지 못한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그동안의 노력이 실패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소련군 최고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0~80년대에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한 여파가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당국의 안이함과 설계국의 농간으로 가짓수만 늘린 결과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무기의 개발과 배치에 있어 교훈으로 삼을 만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