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불거진 통칭 '엘' 사건 관련해 텔레그램 이미지. 사진 JTBC '뉴스룸' 캡처
‘엘’ 사건 ‘늑장 수사’ 확인…사후 조치는

경기북부경찰청. 뉴시스
통칭 ‘엘(L)’로 불리는 이번 사건의 주범 A씨와 관련해 한 10대 피해자는 대화 내역 등 증거를 모아 지난 1월 파주서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피해 내용은 2020년 사회적 공분을 샀던 이른바 ‘n번방 사태’처럼 SNS로 만난 미성년자 등에게 성착취물을 강요한 방식과 비슷했다. 그러나 사건은 규정 등을 이유로 파주서를 떠돌다가 지난 8월 서울경찰청이 주도하는 전담 수사팀이 맡게 됐다. 사건이 접수된 지 약 8개월 만이다. 서울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첩보로 A씨 등을 추적하다가 지난달 파주서의 수사 내용을 알고 이관을 요청했다. 경찰 내 공조가 미적거리는 사이 A씨는 지난 5월 활동을 멈췄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유포 정황이 없어 내부 규정에 따라 처리하는 동안 수사가 지연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는 전문성을 가진 전담 사이버수사팀이 있는 수사과나 상급 기관인 경기북부청이 아니라 여성·청소년 범죄를 주로 다루는 여성청소년(여청)과가 진행했다. 이후 경찰은 페이스북과 텔레그램 등 A씨가 사용했던 SNS 회사 측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으나 수사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확인한 IP는 사용자 특정이 어려운 ‘유동 IP’였고, 텔레그램과 공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용의자 추적에 난항을 겪었지만 사건은 여청과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유포가 확인되면 사이버(수사대)로 이관한다. 그전까지는 여청에서 진행한다’는 경찰 내부 사무 분장 규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신고 당사자 성착취물 유포 정황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수사를 여청과에 국한하게 했다. 경찰 관계자는 “유포 기준을 따져 유포 전이면 여청이 담당이고 유포가 되면 사이버나 지방청으로 이관한다”고 말했다. 성착취물 등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서는 유포 여부를 기준으로 두고 전문 수사팀의 수사 착수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현행 규정이 이어진다면 A씨 등 이번 사례처럼 성착취물 제작·유포 용의자에 대한 수사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 우려가 있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 단체인 ‘리셋(ReSET)’ 측은 “유포 여부에 따라 여청과 사이버가 나뉘는 수사는 피해자에게 혼란과 불편함을 주는 불합리한 수사 절차”라며 “현 시스템에서는 여청과 사이버 두 부서가 핑퐁식으로 사건을 미루는 게 무리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전문 수사팀 개설 필요”

텔레그램 이미지. 사진 JTBC 방송 화면 캡처
디지털 성범죄 전담 수사팀 개설 등 경찰의 적극적인 대처를 주문하는 의견도 있다. 리셋의 한 활동가는 “성착취물 관련 범죄가 이미 굳어진 현재 한시적인 특별수사팀으로는 범죄가 절대 근절될 수 없다”고 말했다. 리셋 측에는 관련 피해 의심 사례 접수가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그는 “경찰이 예산을 편성해 디지털 성범죄를 전담하는 수사팀을 확충하고 관련 범죄에 이해도가 높은 수사 인력을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지난달 31일부터 전담수사팀(TF팀)을 꾸려 A씨 등 관련자를 수사하고 있다. 사건은 n번방 사건을 취재했던 활동가 ‘추적단 불꽃’ 등을 통해 지난달 수면 위로 떠올랐다. 추적단 불꽃 원은지씨가 언론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A씨 등은 “은밀한 사진 등 사생활이 SNS에 퍼지고 있다”며 피해자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추적단 불꽃이나 일반 여성 등을 사칭해 피해자를 안심시킨 뒤 “유포범 주소를 해킹하려고 하니 그와 대화해달라”고 유인했다. 그러나 이는 성착취물을 받아내려는 함정이었다. 이후 A씨 등은 “(보낸) 사진을 주변에 뿌리겠다”며 피해자를 궁지에 빠트렸다. 한 여중생 피해자는 1분에 80여개가 넘는 메시지를 보내는 등 몰아친 A씨 독촉에 10시간 만에 50개가 넘는 성착취물을 보냈다고 한다. 사이버수사 관련 경찰 관계자는 “공포에 빠진 피해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A씨 외 공범이 더 있을 가능성을 열고 수사하고 있다. 알려진 피해자는 미성년자 등 6명이고 관련 성착취물만 350개 이상이지만 피해자 수 등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