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인천상륙작전도 나섰다…'세번째 천안함'에 담긴 혼 [Focus 인사이드]

아픔도 기억해야 할 역사다

 
군함은 전투에서 손상을 입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정해 놓은 내구연한이 지나면 퇴역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많은 장병의 애환이 담겨있기에 군함의 퇴역은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나 퇴역함의 함명을 신조함이 물려받는 경우가 흔하다.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해군 강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2년 12월 1일 성대하게 열린 CVN 65 엔터프라이즈의 퇴역식. 미 해군 역사에서 8번째 엔터프라이즈였는데, 2022년에 건조가 시작된 CVN 80에 함명이 승계될 예정이다. 미 해군

2012년 12월 1일 성대하게 열린 CVN 65 엔터프라이즈의 퇴역식. 미 해군 역사에서 8번째 엔터프라이즈였는데, 2022년에 건조가 시작된 CVN 80에 함명이 승계될 예정이다. 미 해군

 
미국 해군의 엔터프라이즈가 대표적이다. 흔히 엔터프라이즈라고 하면 사상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으로 무려 51년간 현역으로 활약하다 지난 2012년 퇴역한 CVN 65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는 미 해군 역사에서 8대 엔터프라이즈였다. 1775년 독립전쟁 당시 영국으로부터 노획한 70t짜리 소형 범선이 초대 엔터프라이즈였는데, 퀘벡 전투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미 해군은 이 이름을 후속함이 이어가도록 계속 사용했다. 특히 7대 엔터프라이즈인 항공모함 CV-6은 사상 최대의 전쟁에서 전설을 썼다. 전쟁의 균형추를 바꾼 미드웨이해전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무수한 전투에 참전했음에도 종전 때까지 살아남아 미 해군의 자부심이 되었다. 그래서 2028년 배치 예정으로 현재 건조 중인 항공모함 CVN 80이 9대 엔터프라이즈로 예정된 것이 오히려 당연할 정도다.

그렇다고 좋은 전과를 올리거나 활약을 펼친 함명만 승계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항공모함 커레이저스는 제2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17일,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하면서 무기사에 세계 최초로 격침된 항공모함으로 기록됐다. 그럼에도 영국은 커레이저스라는 이름을 1971년에 취역한 핵추진 잠수함에 승계시켰다. 현재까지 5대에 걸쳐 사용된 아크로열의 경우는 더하다.

독일 해군 U-81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 중인 영국 항공모함 아크로열. 비록 영국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지만, 아크로열이라는 함명은 이후 두 척의 항공모함에 연속해서 이어받는다. 위키피디아

독일 해군 U-81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 중인 영국 항공모함 아크로열. 비록 영국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지만, 아크로열이라는 함명은 이후 두 척의 항공모함에 연속해서 이어받는다. 위키피디아

 
3대 아크로열은 1941년에 격침된 항공모함이었는데, 영국은 1950년부터 1979년까지 임무를 수행한 항공모함을 4번째, 그리고 1981년부터 2011년까지 활약한 경항공모함을 5번째 아크로열로 명명해서 운용했다. 오랫동안 바다의 패권을 장악하며 현대 해군의 역사를 선도해 왔던 나라답게 영국은 잊지 말고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전투 중 생을 마감한 함명 또한 소중하게 여긴다.


다시 역사가 시작되다

 
외국의 사례를 들었지만, 우리 해군도 그런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창군 초기에는 보유 함정이 많지 않았고 역사도 짧기에 이름을 승계해서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연륜이 쌓여가자 다시 사용하는 함명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0년 3월 26일에 북한 잠수함의 기습을 받고 침몰한 PCC-772 천안함도 이전에 존재하던 함명을 물려받은 케이스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인양된 뒤 평택 제2함대에 보존 전시 중인 PCC-772. 위키피디아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인양된 뒤 평택 제2함대에 보존 전시 중인 PCC-772. 위키피디아

 
창군 직후 연안 도서 지원을 위해 1949년 7월, 미 해군으로부터 인수한 상륙함 LST-801이 바로 첫 번째 천안함이다. 비록 전투함은 아니었지만, 배수량 1800t의 천안함은 건군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 규모의 함이었다.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LST-801은 옹진반도로 출동했다. 이곳에 주둔한 제17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면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육군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해군의 판단으로 단행된 작전이었다.

그 결과 제17연대는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상태로 옹진반도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와 국군의 예비대가 되어 전쟁 초기 지연전에서 맹활약했고,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하여 반격전의 선봉이 됐다. 이후에도 LST-801은 미곡을 비롯한 귀중한 자원을 후방으로 수송하여 고군분투하는 지상군을 지원했다. 이처럼 육군에게 은인이기도 한 천안함은 공군과도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초대 천안함으로 6ㆍ25전쟁 당시 많은 활약을 펼친 LST-801. 처음 인수 당시에는 용화(龍化)함으로 명명됐다가 이후 천안함으로 함명을 바꿨다. 사진은 1952년 미국 종군기자가 부산에서 촬영한 천안함. 미 공군

초대 천안함으로 6ㆍ25전쟁 당시 많은 활약을 펼친 LST-801. 처음 인수 당시에는 용화(龍化)함으로 명명됐다가 이후 천안함으로 함명을 바꿨다. 사진은 1952년 미국 종군기자가 부산에서 촬영한 천안함. 미 공군

 
전쟁 발발 직후에 미국은 한국 공군이 전투기를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에 나섰다. 이때 한국 조종사들을 교육한 제6146군사고문단장이 영화 ‘전송가’로 유명한 딘 헤스였다. 북진 당시에 헤스는 부대를 김포로 전개하려 했는데 교통편 제공이 전투부대가 우선이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바로 이때 LST-801이 지원에 나서 제때 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헤스의 전기에는 낙후된 천안함을 훌륭하게 운용한 한국 해군에 대한 찬사가 나온다.

그렇게 종횡무진 활약한 LST-801은 1953년 퇴역했고, 천안함이라는 이름은 1989년 취역한 포항급 초계함 14번 함인 PCC-772에 승계됐다. 공교롭게도 2대 천안함이 주로 활약했던 서해 5도 인근은 6ㆍ25전쟁 때 초대 천안함이 활동하던 지역과 일치한다. 비록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했지만, 제1차 연평해전에서 활약하는 등 20년이 넘게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었다.

5월 19일 진해 군항에서 옛 천안함 용사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FFG-826 천안함의 취역식. 뉴스1

5월 19일 진해 군항에서 옛 천안함 용사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FFG-826 천안함의 취역식. 뉴스1

 
그리고 지난 5월 19일, 세 번째 천안함인 호위함 FFG-826이 많은 관심 속에 취역했다. 당국의 설명으로는 전력화 과정과 작전 수행능력 평가를 거친 뒤 올해 말 선배들이 혼을 받쳐 활약했던 서해에 배치할 예정이라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승전의 기쁨은 물론 뼈아팠던 고통도 잊지 말아야 할 역사다. 우리 해군에게 상당히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천안함이라는 이름을 다시 부여받은 FFG-826의 무운장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