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역사가 100년이 넘은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호주 오픈의 위상은 대단하다. 흔히 4대 메이저로 불리는 이들 대회는 불가피한 사유가 없으면 매년 같은 곳에서 개최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경기장의 인지도가 상당한데, 일부 대회의 공식 명칭은 경기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매년 5~6월 사이에 열리며 현재 진행 중인 롤랑 가로스(Les Internationaux de France de Roland Garros)도 프랑스 오픈의 공식 명칭이다.
1891년 프랑스 선수권으로 시작한 대회명이 1927년 경기장이 새로 건립된 이후 이렇게 바뀌었다. 당시 경기장 건설을 주도했던 에밀 르지에 프랑스 테니스 협회장이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인 롤랑 가로스를 기려 이름을 붙였던 것인데, 정작 그가 테니스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테니스계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프랑스 사회에서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가로스는 초창기 항공기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라이트 형제의 성공이 있은 지 10년도 되지 않은 1910년부터 비행기를 탔고, 1913년에 역사상 최초로 지중해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즉시 자원해서 전선으로 달려갔고, 이후 전쟁 내내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전투기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명인이 이렇게 솔선수범하자 찬사가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항공기는 비행 방향인 기수에 기관총을 부착해서 싸우는 것이 효율적이나, 그렇게 하면 목재로 제작된 프로펠러가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개전 1914년 당시에 활약한 전투기들은 후방이나 측방으로 사격하는 방식으로 교전을 벌였다. 당연히 전과가 좋을 리 없었다. 이에 가로스는 프로펠러 날에 강철판을 덧대어 총탄이 부딪히더라도 그냥 튕겨 나가도록 하는 대안을 고안했다.
1915년 4월 1월, 그는 프로펠러를 개량한 모랑 솔니에 L형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다. 이전처럼 정면을 안전지대로 여기고 달려든 독일의 전투기들은 순식간 격추됐다. 그렇게 가로스는 한 달도 되지 않아 3기의 적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기념해 프랑스군은 그에게 에이스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후 5기 이상을 격추한 이를 에이스라고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그의 업적을 기려 역사상 최초로 에이스라는 칭호를 내렸다.
가로스는 이후 독일군에게 생포돼 고초를 겪다가 탈출해서 다시 전선으로 달려갔고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인 1918년 10월 5일, 30번째 생일 전날 독일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한마디로 그는 기술적으로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더 많았던 항공기 여명기의 역사를 개척했던 인물 중 하나이자, 프랑스가 두고두고 자랑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맹활약한 전쟁 영웅이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겼으나 정작 때리다가 지쳐서 항복한 독일보다 피해가 컸기에 승자의 기쁨을 누릴 처지가 아니었다. 전쟁 전에 제국주의 시대를 선도하며 세계를 지배한다던 자부심은 불과 4년 만에 사라졌다. 한세대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사라졌기에 이후 프랑스는 염전사상에 물들었고, 1940년 히틀러가 침략했을 때 초전에 밀리자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암울한 상황을 바꿀 필요가 있었는데 가로스는 충분히 전환점이 될만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인기가 많은 종목의 새로운 경기장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고, 오늘날에 와서는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설령 경기장이나 대회 명칭이 아니더라도 서구에서 이런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영웅에게 존중의 마음을 표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럽다. 이런 경우가 드문 우리에게는 몹시 부러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