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아동 성범죄자도 공무원 된다…'싸움국회'가 만든 이런 현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공무원 임용을 금지한 국가공무원법(33조)·지방공무원법(31조)·군인사법(10조) 등에 관련 법률 조항이 한꺼번에 무효가 됐다. 헌법재판소가 ‘영원히 금지하는 건 과도하다’며 2024년 5월까지 법을 개정해 달라는 취지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는데, 국회가 법 개정은 하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벌금형 100만원 미만을 받은 경우엔 공무원 임용이 가능해졌다. 여야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정쟁(政爭)에 매몰된 결과다. 

제22대 국회의원들이 2일 국회 개회식이 끝난 뒤 국회 본청 앞에서 단체기념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제22대 국회의원들이 2일 국회 개회식이 끝난 뒤 국회 본청 앞에서 단체기념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헌재가 국가공무원법·군인사법상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자 임용 배제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건 2022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세 아동에게 성적수치심을 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 400만원 벌금형을 받은 남성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재는 해당 규정이 헌법상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난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아동과 관련 없는 직무를 포함해 모든 일반직 공무원·부사관에 임용될 수 없도록 한 것은 제한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포괄적”이라는 이유였다. 

다만 헌재는 곧바로 해당 법규를 무효로 하는 ‘단순 위헌’ 대신, 2024년 5월 31일까진 법률을 살려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국회 권한을 존중한다는 취지였다. 결정문엔 이례적으로 “입법자가 여러 정책적 대안을 숙고하고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거쳐 위헌성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고 적었다. 하지만 국회는 1년 6개월 넘게 법 개정을 하지 않았고, 결국 미성년자 성범죄자의 공무원 임용 배제 규정 전체가 사라졌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법률안이 없던 건 아니었다. 지난해 5월과 6월 당시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과 문진석 민주당 의원은 미성년자의 임용 배제 기간을 각각 10년과 15년으로 하는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부도 임용 배제 기간을 20년으로 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위헌 소지를 없애면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자의 공직 진출을 막기 위한 취지였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단 한 차례의 심사도 받지 못했다. 국회 행안위가 여야의 주(主)전장이 됐기 때문이다. 

여야의 정쟁 속에 효력이 사라진 법은 한둘이 아니다. 형법상 낙태죄 조항은 이미 2021년 1월부터 효력이 사라졌다. 낙태 처벌은 물론, 안전하고 건강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사라졌다. 국민투표제는 2016년부터 불가능해졌다.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국민투표법상 재외국민 조항을 국회가 개정하지 않은 탓이다. 이 같은 실효(失效) 법률의 개수는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해 4건→8건으로 늘었다. 1년 내 개정 기한이 도래하는 헌법불합치 결정 법률도 6건이다. 여야가 현재처럼 정쟁만 일삼으면 1년 내 효력이 상실되는 법률은 14건에 이르게 된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2020년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2020년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대통령 관저와 국회의장 공관 주변 집회 금지 규정 역시 지난 6월 ‘미성년 대상 성범죄자 공무원 금지 규정’과 함께 사라졌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국회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지 않아서다. 경찰 관계자는 “헌재 결정은 대통령 관저 보호라는 목적은 정당하나 모든 집회를 금지하는 게 과도하다는 취지였는데, 법규 효력이 아예 사라져서 그때그때 다른 법 규정을 끌어와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전했다.

국회 법제실에 따르면,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고도 개정되지 않은 법률은 16건(2022년 11월)→19건(2023년 10월)→21건(2024년 9월)으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는 속도에 비해 법 개정이 더딘 탓이다. 국회 법사위 관계자는 “예전에는 싸울 땐 싸우더라도 밀린 숙제가 있으면 합심해서 처리하곤 했는데, 이제는 각 당 지도부가 오더를 때리지 않으면 한 발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 됐다”고 전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여야의 방치 속에 가족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8촌 이내 혈족 사이의 혼인을 일률적으로 무효로 규정한 민법 규정 ▶혼외자 출생신고 방법을 정해놓은 가족관계등록법 규정의 개정 시한이 각각 올해 12월과 내년 5월로 다가온 탓이다. 이들 법규도 개정 시한을 넘기면 효력이 사라진다. 8촌 이내 혈족혼(婚)과 혼외자 출생신고 모두 입법 공백 상태에 놓인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헌법불합치 결정은 일부 규정은 살리고 과도한 부분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인데, 국회가 날짜를 지키지 않아 낙태죄도 국민투표제도 죄다 ‘입법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며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