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 최고경영자(CEO) 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리더십 교체'를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흐름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도 실적 부진에 대응해 수시로 수장을 교체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8일 야후파이낸스에 따르면 글로벌 취업정보업체 챌린저그레이&크리스마스(CG&C)가 올 1~10월 미국 기업에서 퇴사한 CEO를 조사한 결과 총 1824명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1530명) 대비 19% 증가한 수치로, 이 회사가 CEO 교체를 집계한 2002년 이후 최대였다. 숫자도 많았지만 굵직한 기업의 CEO 교체도 눈에 띄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인텔은 팻 겔싱어 CEO가 은퇴하고 이사회에서도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는 인텔의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했지만,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블룸버그는 겔싱어 CEO가 이사회로부터 ‘은퇴 혹은 해고’를 요구받았다고 보도했다. 올해 미국 정보기술(IT) 기업 CEO 중 192명이 퇴임해, 전년 동기 대비 32% 늘었다.
최근 세계 4위 완성차업체 스텔란티스의 카를로스 타바레스 CEO도 경질됐다. 그의 임기는 2026년까지였으나 경영악화에 따른 거취 압박이 이어지자 사임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스타벅스와 나이키 역시 각각 지난 8월, 10월에 실적 및 주가 부진을 이유로 CEO를 교체했다. 데이비드 카스 메릴랜드대 교수는 야후파이낸스에 “기업 이사회가 점점 더 독립적으로 변하면서 수익과 주가 모두에서 저조한 성과를 내는 CEO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라며 “이런 성과 압박으로 CEO의 평균 재임 기간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증시가 최근 2년간 전반적으로 활황을 보인 것도 CEO에게는 부담이다. 마이클 파 하이타워 어드바이저스 수석시장전략가는 “다른 기업들이 성장하는 동안 회사가 침체에 빠진다면 CEO나 이사회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며 “CEO가 실제로 잘못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대내외 환경이 빠르게 바뀌면서 변화에 맞는 리더십을 요구하는 건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다. 롯데는 지난달 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CEO 21명(36%)을 교체했다. 역대 롯데그룹 인사 중 최대 규모다. 고강도 인적 쇄신을 통해 경영체질을 혁신하고 본원적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0월 계열사 7곳 가운데 SK에너지·SK지오센트릭·SK아이이테크놀로지 등 3곳의 CEO를 교체했다.
삼성·SK·LG그룹은 올 연말 정기 인사에서 사장단을 대부분 유임하며 안정을 택했지만,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는 연중 수시 인사를 확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반도체(DS)부문장을 전영현 부회장으로 교체했고, SK에코플랜트·SK스퀘어, 한화솔루션 케미칼·큐셀 부문, 신세계건설 등 역시 연중 CEO를 교체하며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연말 정기 인사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이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권상집 한성대 기업경영트랙 교수는 “미국은 이사회 중심 경영이라 CEO들이 이사회에 분기 실적 보고를 할 때 마치 면접을 보듯 긴장할 정도”라며 “한국은 오너 중심 경영이라 위기 상황에서 오래 일해 본, 경험 있는 인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다만 한국에서도 수시 인사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