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투자심리 꺾였다"…'코리아 엑소더스' 우려 확산

탄핵 정국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한국 증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수출 둔화와 내수 부진이라는 안팎의 어려움 속에 예상치 못한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서, 당분간 웬만한 호재로는 증시 반등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비관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안 표결이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투표 불성립’ 된 뒤 시장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 모습. 김종호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안 표결이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투표 불성립’ 된 뒤 시장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 모습. 김종호 기자

지난 7일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폐기되면서 증권가의 불안감은 커졌다. 탄핵안 표결이 예고된 이후 자본시장에선 2016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국면과 유사한 상황을 예상해 왔다. 당시엔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일단락되고 주가도 상승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코스피는 탄핵안이 통과된 2016년 12월 9일 2024.69에서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한 2017년 3월 10일 2097.35까지 올랐다.  

목대균 KCGI자산운용 운용총괄대표는 “정치적 불확실성이 계속될 경우 단기적으로는 투자 심리가 위축되고, 중·장기적으로 기업이익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외국인투자자에게 한국 증시의 가격적인 매력이 부각되는 시점이지만, 정치적 불확실성에 투자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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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부양 정책 카드를 쓰는 데 실기(失期)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마경환 GB투자자문 대표는 “해외투자자를 비롯한 시장 참여자들이 과거에 탄핵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한국 주식과 채권을 투매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불확실 상황이 길어질수록 경기 부양책 타이밍을 놓칠 수 있고, 새로 출범하는 미국 정부와 외교가 지연되는 등 반전의 모멘텀을 찾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정치발 악재가 더욱 우려스러운 건 최근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 자체가 좋지 않아서다. 내수 위축은 물론, 범용(레거시)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 등 수출에도 부정적인 요인이 많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28일 발표한 경제 전망에서 내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1.9%로 8월 전망치보다 0.2%포인트 낮춰 잡았다. 신영증권 김학균 리서치센터장은 “지금 경제 상황은 과거 탄핵 국면과는 다르다”며 “2016년 탄핵 때는 경기가 바닥을 치고 회복하는 국면이지만 현재는 경기가 고점에서 하락하고 있는 데다 내수 시장 역시 구조적인 충격이 쌓여 견디지 못하는 자영업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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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외국인투자자의 ‘코리아 엑소더스(대탈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3일 모처럼 한국 증시에서 7970억원 ‘사자’에 나선 외국인들은 계엄 발표 다음날인 4일(수요일)부터 사흘 동안 1조원 어치를 순매도했다. 이한영 보고펀드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지난 3일 외국인 자금이 의미 있는 액수로 유입돼 반등을 기대했지만, 그날 밤 계엄 발표로 투자심리가 꺾였다”고 지적했다.

외국계 투자은행(IB)들은 앞다퉈 한국 증시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홍콩계 증권사 CLSA는 “7월 이후 실망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온 한국 주식에 정치 리스크가 추가됐다”며 “내년 한국 시장 비중을 줄이고, 그 시기도 앞당겨야 한다”는 투자 의견을 냈다. 모건스탠리도 “대통령 교체 가능성, 불확실한 정책 등이 시장 우려를 증폭시킬 수 있고 내수·투자 활동이 위축될 위험도 더 커졌다”고 진단했다. 모건스탠리는 이미 한국 주식에 대한 투자의견을 중립에서 비중축소(매도)로 낮췄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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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향후 주가가 더 하락하더라도 ‘저가 매수’를 노린 신규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학균 센터장은 “한국 주식이 저평가 영역인 것은 맞지만, 저평가가 곧 주가 바닥이라는 의미는 아니다”며 “외적 환경이 나쁘면 더 하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목대균 대표는 “이미 주가 변동성이 커지기 시작한 만큼 기존 투자자라면 손절하기보다는 은행, 헬스케어 등 방어적인 주식을 눈여겨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특히 정치적 불확실성이 줄더라도 당분간 한국 증시의 상승 동력이 부족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정치권의 변화가 한국 증시의 판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할 것 같다. 지금으로선 주가가 많이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증시 투자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리서치센터장도 “대통령과 여당 뿐 아니라 야당에 대한 반대도 많은 상황”이라며 “탄핵안이 가결되거나 대통령이 퇴진한다고 해도 정치적 갈등과 불안이 여전해 반등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