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 열풍에 힘입어 수출을 늘려가고 있는 한 중소 화장품 업체는 지난 5일 베트남 판매 대행업체로부터 문의 전화를 받았다. 시장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관계자들의 안전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화장품 제조·생산을 담당하는 또 다른 업체는 미국, 유럽 고객사들의 연락이 잇따르자 해외 고객사 전체를 대상으로 공지 메일을 보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생산 공정과 납기 예정일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문의가 많았다”며 “고객사들에 공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렸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로 힘겨워하던 산업계가 또다시 악재를 맞았다. 8년 만에 되풀이 된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정치적 혼란이 커지면서다. 해외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뷰티·여행업계 등은 ‘한국 포비아’로 인한 매출 감소를 걱정하는 상황이다. 내수 위주의 유통·식품업계도 소비 심리 위축과 환율 변동으로 인한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방한 관광·기업인, 일정 축소 우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전체 임직원에게 한국 출장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긴급 공지 메일을 발송했고, 구글코리아는 전사 재택근무 조치에 나섰다. 미국에 본사를 둔 한 글로벌 소재 기업 역시 한국 생산 현장을 방문하기로 했던 고위 관계자가 일정을 축소해 하루 만에 귀국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출장을 취소하려는 것을 겨우 설득해 서울엔 왔지만, 공장도 방문하지 않고 현안 보고만 받은 뒤 급히 미국으로 돌아갔다”라며 “예정된 투자까지 취소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늘며 매출 회복에 기대를 걸었던 관광업계도 계엄 선포와 해제, 대통령 탄핵 추진으로 이어지는 정치 상황이 실적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 10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160만 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30.1% 증가했다. 중국(29만2000명), 일본(32만3000명), 미국(14만1000명), 대만(13만3000명) 등의 관광객이 늘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미국, 영국, 일본, 싱가포르 등이 주한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 체류 중인 자국민들에게 주의를 권고하는 등 ‘한국 여행 주의보’를 공식화하며 우려가 나온다. 여행업체 관계자는 “국내에서 해외로 가는 여행 수요는 유지되겠지만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인바운드 시장이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율에 떠는 식품업계
원화 가치 하락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며 원재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업계의 고민도 커졌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카카오·커피 원두 가격 폭등으로 관련 가공식품의 소비자 가격이 오르고 있는데, 환율까지 치솟으면 장기적으론 다른 원재료 구매 비용도 증가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유통가 최대 성수기 ‘찬물’
크리스마스와 연말 특수를 기대하고 있던 유통업계도 최대 성수기를 앞두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내년 설이 1월 말로 예년보다 빠른 편이라 유통 기업들은 이달 말부터 설 선물 판매를 준비 중인데 소비 침체로 매출이 줄까 걱정이다. 백화점 업계 관계자는 “선물 수요가 많은 연말에 정치 이슈가 사회를 뒤덮으면 매출에 타격이 있을 수 있다”며 “특히 교통 혼잡이나 안전 문제 때문에 서울 중심가의 매장 방문 고객이 줄어들고, 불안한 상황이 더 길어지면 외국인 관광객 수도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8년 전 대통령 탄핵 후에도 소비자 심리 지표가 떨어지고 민간 소비도 급락했다”며 “정치적 사태로 내수 부진이 좀 더 길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반등 기회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