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으로부터 사실상의 ‘불신임’을 받은 크리스토퍼 레이(57)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11일(현지시간)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함께 사퇴할 뜻을 밝혔다. 레이 국장은 이날 FBI 직원들과의 면담 행사에서 “현 행정부가 끝날 때까지 일하고 물러나는 것이 FBI에 옳은 일이라 판단했다”며 내년 1월 20일 트럼프의 취임과 함께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이 지난해 12월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상원 법사위원회 감독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FBI 국장의 사의 표명은 트럼프의 압박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레이 국장의 임기(10년)는 2년여 남았지만, 트럼프는 지난달 30일 최측근이자 대표적 ‘충성파’인 캐시 파텔(44) 전 국방장관 대행 비서실장을 차기 FBI국장으로 지명하며 레이 국장의 사퇴를 압박해왔다.
레이 국장은 2017년 트럼프 1기 때 임명됐지만,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낙선한 뒤 기밀자료 반출 및 불법 보관 혐의에 대한 수사에서 FBI가 트럼프의 자택인 플로리다주 마러라고를 압수수색한 일을 계기로 눈밖에 났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1일(현지시간)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이 자신의 취임과 함께 물러날 뜻을 밝히자 ″미국의 위대한 날″이라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트럼프 SNS캡쳐
실제 트럼프는 이날 레이 국장의 사의 표명 직후 소셜미디어에 “레이의 사임은 ‘비(非) 정의부(Department of Injustice)’가 된 (법무부) 조직의 무기화를 끝낸다는 점에서 미국의 위대한 날(great day)”이라고 적었다. 법무부의 명칭에 들어가는 정의(Justice)를 비정의(Injustice)로 비튼 배경에 대해선 “레이의 지휘 아래 FBI는 아무 이유 없이 내 집을 불법적으로 급습했고, 나를 불법적으로 탄핵하고 기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FBI는 미국 최고의 수사기관으로 테러, 사이버범죄, 화이트칼라 범죄, 부패, 민권 침해 등에 대한 수사와 관련한 방대한 정보를 관리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FBI 국장의 임기를 10년으로 정해 정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왔다.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이 지난 7월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하원 법사위원회에 증언하기 위해 선서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그러나 트럼프는 2017년 집권 1기 때도 임기가 남아 있던 제임스 코미 당시 국장이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트위터(현 엑스)로 해임을 통보했다. 코미에 이어 임명된 이가 레이 국장이다.
다만 레이 국장은 당시 청문회 내내 “트럼프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겠다. 내 충성심은 오로지 헌법과 법치에만 있다”고 했고, 지난해 트럼프 수사와 관련한 의회 증언 때는 “나는 공화당원에 의해 임명된 공화당원”이라며 “내가 보수 인사에 편견이 있다는 (트럼프의)주장은 미친 짓”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이날 레이 국장의 후임으로 지명한 캐시 파텔에 대해선 “FBI 역사상 FBI를 이끌 자격을 가장 잘 갖춘 후보자”라며 “파텔의 (상원) 인준을 고대한다”고 했다. 파텔은 트럼프가 패배한 2020년 대선을 ‘사기’로 규정하며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언론인 등에 대한 보복을 예고해왔던 인물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차기 FBI 국장으로 지명한 캐시 파텔이 11일 국회의사당 당내에서 자신의 인준에 부정적인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면담하며 인준 과정에서의 협조를 당부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1기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파텔을 경험했던 존 볼턴은 지난 10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기고한 글에서 “트럼프의 인사는 헌법이 아닌 자신에 대한 충성심에 맞춰져 있고, 파텔은 이에 명확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상원이 파텔에 대한 인준에 찬성한다면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내년 1월 100명으로 구성되는 미국의 상원은 53대 47의 공화당 우위가 된다. 민주당 상원의원 47명이 모두 반대한다는 것을 전제로 공화당 내에서 4명 이상이 ‘이탈’할 경우 트럼프가 지명한 인사들은 인준을 받지 못한다. 미성년자 성매수 의혹 등을 받았던 맷 게이츠 전 하원의원도 공화당 상원의원 4명 이상이 인준에 반대하면서 법무장관 후보직에서 자진사퇴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국방장관 후보로 지명한 피트 헤이그스가 11일(현지시간)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조시 홀리 미 상원의원과 회동한 뒤 부인 제니퍼 라우쳇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현재 미국 정치권에서는 파텔과 함께 전문성 부족과 성폭력 의혹을 받는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옹호했던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DNI) 국장 지명자, 백신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해 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 지명자 등 4명은 상원 인준을 낙관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