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2019년 8월 말 조국 사태 때부터 정국의 한복판에 있었던 그는 검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순식간에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고, 하강 역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수직낙하했다. 윤 대통령은 야당을 겨냥해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12일 대국민담화)이라고 규정했지만, 오히려 45년만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등 본인 스스로가 ‘괴물’로 전락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몰락의 단초는 계엄 이전부터 잉태됐었다. 지난 11월 임기 반환점에 공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10%대 후반에 그쳤다. ‘87년 체제’ 이후 최약체 정부로, 사실상 식물정부였다. 국정 운영의 기본인 세가지 요소가 부재했다.
①정치의 실종=0.73%포인트 차 간발의 당선이었다. 그만큼 출범 때부터 취약했다. 하지만 역경을 돌파해 온 윤 대통령은 이같은 현실을 외면한 채 반대 세력과의 협력을 차단했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와 민주당의 방탄 폭주가 윤 대통령의 야당 배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결국 이 대표와의 회담은 총선 이후에나 성사됐다. 탄핵 남발(17회)과 입법 독주, 이에 맞선 거부권 행사(25회)의 악순환이었다.
더 뼈아픈 건 당정 관계였다. 짧은 정치 경험으로 당내 기반이 약한 윤 대통령은 반대급부로 여당 장악에 더 매달렸다. 이준석 축출과 김기현 선출 과정에서 지지층 이반이 심화됐다.
결정타는 한동훈 대표와의 충돌이었다. 사실 총선을 앞두고 2월말까지 민주당의 ‘비명횡사’로 여당의 전망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3월 들어 조국혁신당 돌풍과 이종섭ㆍ황상무 사태로 여론은 급반전했다. 대통령실 참모진이 사태 수습을 위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당시 윤 대통령은 태연하게 이렇게 답했다. “선거 져도 돼.” 비례대표에서 탈락한 주기환씨를 곧바로 대통령 민생특보로 임명하고, 이를 참모진이 만류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윤-한 갈등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순간이었다.
정책은 이해 당사자의 입장을 조정하기보다 일방적이었다. 이에 반발하면 사교육 이권 카르텔, 의사 카르텔로 낙인찍혔다. “정책 추진도 수사하듯 한다”는 뒷말이 나왔다.
③가치의 실종=현 정부의 모토는 ‘공정과 상식’이었다. 윤 대통령은 2013년 국정감사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2020년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란 말로 각광받았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윤석열 정부의 상징 자본이었다.
하지만 집권후 행태는 정반대였다. 아킬레스건은 김건희 여사였다. 주가조작ㆍ명품백ㆍ명태균 의혹이 돌출할 때마다 사정 기관의 칼날은 김 여사를 비켜섰다. 김건희 특검법을 방어하는 데 여권의 에너지를 총동원했고, 국정 성과는 그대로 묻혔다. 김건희 리스크에 현 정부가 질식당하고 있음에도 윤 대통령은 이를 방치했다.
한국 정치 시스템이 망가졌다는 건 대다수 전문가의 공통된 진단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등을 거치며 상대방은 어느새 척결 대상이 됐다. 진영 대결이 가팔라질수록 내부 이견은 ‘수박’이자 ‘배신자’로 치부된다.
승자독식의 제도도 기름을 붓고 있다. 0.73%포인트만 이겨도 대통령은 행정부를 넘어 사법부 인사까지 좌지우지한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득표율 차는 고작 5.4%포인트였지만 지역구 의석수는 161석 대 90석이었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87년 체제는 물론 88년 소선거구제도 한계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황폐화된 정치 문화와 노쇠한 제도를 계속 방치한다면 제2, 제3의 윤석열은 또 배출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