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20일 오전 9시26분쯤 전북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 탑차 밑에 두고 간 성금 상자. 상자 안엔 오만원권 지폐 다발과 동전이 든 돼지 저금통·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따뜻한 한 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혀 있다. 사진 전주시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2000년부터 2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로 주민센터에 익명으로 성금을 기부해 온 터다. 이번에 두고 간 성금을 포함해 누적 기부금이 10억원이 넘는다. 전주시 안팎에선 “올해는 대통령 탄핵 정국 탓에 ‘얼굴 없는 천사’가 안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였다.
20일 전주시에 따르면 ‘얼굴 없는 천사’는 이날 오전 9시26분쯤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에 성금을 두고 사라졌다. 노송동 주민센터에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익명 전화가 걸려왔는데 “기자촌 한식 뷔페(식당) 맞은편 탑차 아래 (성금 상자를) 뒀으니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주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주민센터 측은 “40~50대 남성 목소리였다”고 전했다.
20일 오전 9시26분쯤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 인근 탑차 아래 두고 간 성금 상자. 사진 전주시
올해 8003만원…누적 10억4483만원 기부
주민센터 직원들이 230m 떨어진 현장에 가보니 전화 내용대로 A4용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오만원권 지폐 다발과 동전이 든 돼지 저금통·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따뜻한 한 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주민센터 측이 상자 속 성금 액수를 확인한 결과 8003만8850원이었다. 올해까지 25년간 ‘얼굴 없는 천사’의 총 기부액은 10억4483만6520원에 달한다.
이름과 직업은 물론 모든 게 베일에 싸인 ‘얼굴 없는 천사’는 해마다 12월 성탄절 전후로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 성금과 편지를 담아 노송동 주민센터에 맡기고 사라지는 익명 기부자다. 전주시는 그간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 등 소외 계층 6937가구(2023년 12월 기준)에 현금이나 쌀·연탄·난방 주유권 등으로 지원했다. 올해 성금도 ‘얼굴 없는 천사’의 뜻에 따라 지역 학생을 위한 장학금과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쓸 예정이다.
2019년 12월 30일 전주 완산경찰서에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통째로 가져간 혐의로 붙잡힌 절도범 2인조 중 1명이 고개를 숙인 채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5년 전에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2인조 절도범이 천사의 선행 소식을 듣고 충남에서 전주까지 원정 절도에 나섰다. 절도범들은 2019년 12월 30일 오전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을 배회하다가 ‘얼굴 없는 천사’가 주민센터 뒤편 공원 내 나무 밑에 두고 간 성금 6016만3510원을 상자째 차에 싣고 달아났다.
이들은 당시 주민 제보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항소심 재판부는 2020년 6월 두 사람에게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8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과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후 전주시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상자를 지키기 위해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에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했다. 이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천사의 선행은 멈추지 않았다. 그를 본받아 익명으로 성금을 내는 시민도 꾸준히 생겨났다.
우범기 전주시장은 “해마다 이어지는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선행으로 전국에 익명 기부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며 “‘얼굴 없는 천사’가 베푼 온정을 소외 계층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