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아닌 현실이 된 계엄…보수는 헌법가치 지켜야 [하헌기가 소리내다]

비상계엄을 발동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이 통과됐다. 이를 계기로 국민의힘이 계엄과 확실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래픽=정근영 디자이너

비상계엄을 발동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이 통과됐다. 이를 계기로 국민의힘이 계엄과 확실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래픽=정근영 디자이너

그들은 뿌리가 어디인지 잊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 표결에서 대부분의 국민의힘 의원들은 탄핵에 반대했다. 지금도 비슷한 입장인 것 같다. 표결을 앞두고 소장파 의원 몇이 탄핵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시사하자 5선 중진 윤상현 의원은 언론에 이런 표현을 썼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고 있지 않습니까.” 늙은 말은 지나온 길을 알고 있으니 길을 잃었을 땐 늙은 말을 따라오라는 의미쯤 될 것 같다. 여기서 국민의힘의 중진들이 ‘지나온 길’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다.

 그 탄핵으로 보수 진영이 궤멸할 뻔했고, 거기에 동참한 의원들은 정치 생명이 끊어질 뻔했던 역사를 지나와 봤기 때문에 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보수 정당이 ‘지나온 길’은 지금 국민의힘 중진의원이 지나온 길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중진들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란 사태에 한해선 윤상현 의원을 포함한 국민의힘 중진들은 길을 알고 있는 ‘노마(老馬)’가 아니다.

 

윤 대통령과의 단절이 필요하다

 국민의힘의 중진의원들이 아니라 진짜 ‘노마’에 해당하는 보수의 원로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보수가 국민의힘 중진 의원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그들과 정반대로, 윤 대통령과의 단절과 청산을 이야기한다. 중진들은 박근혜 탄핵의 사례를 보고 보수의 길을 논하지만 노마들은 그보다 더 오래된 보수의 역사를 반추한다. 그들은 윤 대통령 탄핵을 보며 새누리당이 아니라 민주정의당을 떠올릴 것이다. 중진들 보기엔 똑같은 ‘탄핵 사태’인 모양이지만, 헌정 체제 안에서 권력을 잘못 운영했다가 탄핵이 된 박 전 대통령과 헌정 체제 자체를 타격한 윤 대통령이 근본적으로 다른 경우임을, 노마는 아는 것이다.

 
 지금 보수가 참고해야 할 역사는 박근혜 탄핵이 아니다. 전두환 사례다. 박 전 대통령이 정권을 상실하고 보수 진영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보수의 뿌리를 흔든 건 아니다. 윤 대통령은 다르다. 줄기와 열매, 가지에 궤멸적 데미지를 입는 정도를 넘어 아예 뿌리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국민의힘의 뿌리가 어디인가. 적어도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아닐 것이다. 거꾸로 하나회를 숙청한 대통령이 속했던 정당, 민주자유당이 지금 국민의힘의 뿌리다.


 
 “지금 민주화 세력은 ‘계엄 환각’에 빠져있다.” 지난해 10월 초 〈소리내다〉에 그렇게 썼다. 2024년에 계엄은 불가능한 일인데, 민주당이 자꾸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적 맥락이었다. SNS에도 이렇게도 썼다. “이 정권에서 하고 싶어하거나 시도하는 것 중엔 ‘가·불가’의 영역에서 봤을 때 가능한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들이 얼마나 하고 싶어하느냐와 별도로 실제론 ‘불가능한 일’도 막 저질러 댄다.” 

 하도 해괴한 사람들이니 계엄도 시도는 할 수 있지만 결코 성공할 순 없다고 봤다. 계엄을 하려 들면 사실상 ‘내란’이 될 수밖에 없는데 민도가 그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며 과거와 달리 장병들은 순순히 따르지 않을 거라고.

 그 글에서 두 가지가 틀렸다. 첫째, 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다. 둘째, 국민의힘 역시 계엄에는 반대할 것이라고 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나머지는 그대로 돌아갔다. 계엄은 사실상 내란이 되었고, 국회와 국민과 부당한 명령에 사실상 태업한 장병들 덕에 실패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다 보니 내란 획책을 막으려던 노력을 단순히 ‘음모론’으로 치부했던 건 오만이었단 생각이 든다. 반성하고 사과드린다.

 대한민국에서 군사 반란이 거의 불가역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데에는 다만 6월 항쟁과 그 후 수립된 1987년 체제 덕분만은 아니다. 신군부 세력을 확실하게 청산했던 문민정부의 공로도 있다. 엄연히 보수 정권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좌우 보혁의 극심한 갈등으로 정치적 내전 상황에 이르렀다는 우려를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87년 체제 안에서의 경쟁이었고 갈등이었다. 

민정당으로 회귀하면 안 돼

 우경화될지언정 민정당을 지향하는 보수 정당은 없었고 권위주의적일지언정 군사독재정권으로 회귀하려는 보수 정부도 없었다. 민주개혁세력과 마찬가지로 보수 역시 선거로 국민에게 심판을 받으면서도 다시 선거로 국민에게 기회를 받아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의 보수 세력 역시 ‘군사독재 정부를 함께 청산한 87년 체제 이후 대한민국의 한 부분’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보수가 맞이한 진짜 위기는 단지 또 한 번의 대통령 탄핵과 정권 상실이 아니다. 탄핵이 됐어도, 정권을 상실해도 민주공화정 안에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시 유권자로부터 기회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뿌리만 살린다면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부러져도 언젠가 싹을 다시 틔울 수 있단 얘기다. 그러나 뿌리가 뽑힌다면 당장에 붙어있는 줄기와 열매가 다 무망한 것이 된다. 

 과거 군부와 단절했던 보수가 이번에도 내란 세력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를 지켜 민주공화정의 한 파트로 계속 남길 바란다. 그것이 보수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다. 대한민국 전체로 봐도 그렇다. 우선 대한민국이란 새의 양 날개 둘 다 민주공화정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게 먼저지, 왼쪽으로 날지, 오른쪽으로 날지, 아니면 개헌해서 날개를 업그레이드할지 그런 논의는 그다음의 문제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장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