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중독'에 죽음까지 생각한 정신과 의사…그 전화가 살렸다 [안혜리의 인생]

박종석 정신과 전문의 - 주식으로 망했던 정신과 의사, 어떻게 주식 중독에서 벗어났나

주식으로 무너졌다가 재기한 정신과 전문의 박종석 원장을 지난 12월 24일 서울 구로구 본인의 정신과 병원에서 만났다. 장진영 기자

주식으로 무너졌다가 재기한 정신과 전문의 박종석 원장을 지난 12월 24일 서울 구로구 본인의 정신과 병원에서 만났다. 장진영 기자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점심 무렵에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연세봄정신의학과를 찾았다. 서른 중반 나이에 성급하고 무모한 주식 투자로 돈과 직장 모두 잃고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려는 순간, 딱히 친하지도 않았던 중학교 동창 딱 한 사람의 지지 덕분에 살아갈 용기를 얻어 재기한 정신과 전문의 박종석(44) 연세대 외래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경험담을 풀어낸『살려주식시오』『구로동 주식 클럽』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부자 말고 빠른 부자 원하는 세상
비교 지옥 속 열등감에 정신 피폐
크리스마스에 정신과 붐비는 이유
퀀텀 점프 대신 '차근차근'이 정답
성탄 휴일을 앞둔 진료실 앞 소파엔 환자가 꽤 많았다. 박 원장은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만큼은 개점휴업이라 할 정도로 한산했는데 올해는 환자가 너무 많다"며 "가뜩이나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와중에 비상계엄까지 겹친 영향이 큰 거 같다"고 말했다. 

계엄은 빠르게 해제됐지만 뉴스 속 사건으로 치부하지 못하고 자기 일처럼 타격을 받았다는 얘기다. 그는 또 "평소 누적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쫓기는 감정으로 현재를 살기에 모든 일이 잘 돌아가도 외줄 타기 하듯 초조하다"고 했다. 전엔 인간관계와 관련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았는데 이젠 진료실 문 열자마자 "돈 때문에 우울하다"며 말문을 여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고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주식은 고꾸라지고, 널뛴 코인 앞에 투자 기회 놓쳐 나만 뒤처진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악영향을 준 셈이다. 지난 2023년 한국 사회에 불안 장애로 병원을 찾은 사람은 83만7000명으로, 11년 새 75% 급증했다. 

안혜리의 인생

어쩌다 우리 사회는 모든 걸 다 갖고 시작하는 상위 0.1%의 삶만이 행복의 정의인양 오해하고, 빨리 퀀텀 점프라도 해서 당장 부자가 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된 걸까. 지난 12월 24일 박 원장을 만나 경험에서 나온 진단과 조언을 들은 후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부자 중독 권하는 사회

중소기업이 병원 주변에 많다 보니 미래 불안에 시달리는 30대 젊은 직장인 환자가 많다. 코인·주식 등 투자 중독, 아니 부자 중독·욕망 중독에 빠져 인생 역전 노리다 망가진 환자를 보면 10년 전 나 같다. 


30대 중후반엔 돈 없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흙수저 출신에 부모 지원이 부족했다고 여긴 36세 노총각이었던 그 시절의 난 결혼 못 한 이유를 오로지 돈에서 찾았다. 주식으로 빨리 뻥튀기해서 나를 포장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주식이 고꾸라져도, 거꾸로 코인이 크게 올라도, 한탕에 부자될 마음에 공부하는 투자 아닌 한탕을 노리는 도박 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다. 크게 오른 비트코인.

주식이 고꾸라져도, 거꾸로 코인이 크게 올라도, 한탕에 부자될 마음에 공부하는 투자 아닌 한탕을 노리는 도박 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다. 크게 오른 비트코인.

돌이켜보면 행복도 우월감으로 측정하는 한국이라는 비교 지옥, 그리고 고교 때부터 짓누른 내 경제형편이 크게 작용했다. 내 또래 많은 이들처럼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그 후 늘 돈 걱정했던 어머니는 여유로운 의사 외삼촌을 부러워했고 외아들인 나에게 "무조건 의대"를 외쳤다. "공부 잘해야 돼, 의사 돼서 돈 많이 벌면 행복해질 거야. "

다행히 성적이 좋아 의대에 갔지만, 주삿바늘 꽂고 채혈하는 것만 봐도 어지러울 정도로 피가 무서웠다. 포르말린 냄새와 시신 뒤로 숨고, 토했다. 흉부외과 실습 땐 기절 직전에 갈 만큼 스트레스가 컸다. 그런데도 부모의 절실한 기대를 배반할 수는 없었다. 

실습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쉽지 않았다. 의사나 전문직 부모를 둔 부잣집 의대 동기들을 보면 "내가 여기 속해 있는 게 맞나"라는 열등감에 괴로웠다. 가정형편 어려운 친구들은 또 "우리 같은 흙수저는 같은 의사 만날 게 아니라 무조건 병원 차려주는 부잣집 딸 만나야 돼, 편하게 엘리베이터 좀 타자"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부끄러웠다. 

당시 내가 찾은 해법은 혼테크같은 무임승차가 아니라 나 스스로 부자 되기였다. 지금은 틀렸다는 걸 알지만, 그땐 차근차근 돈 벌 여유는 없었다. 투자라는 이름의 도박에 뛰어들게 된 배경이다. 

지금 나를 찾아오는 많은 청년이 그렇다. 서울 전세금 정도는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초조함과 조급함이 그득하다. 그들에게 인생은 게임이나 레이스다. 100층에서 태어난 금수저 따라잡으려면 계단 정도론 어림없고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헬기 같은 반칙이라도 동원해야 한다며 정상 속도의 서너 배 과속하며 무리한다. 그러다 돈 날리고 불안에 잠식당해 정신과를 찾아 "한국 망했다, 내 인생 망했다"를 외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살만하고, 인생도 얼마든지 다시 제 궤도에 올릴 수 있다.  

추락의 끝

고작 1000만원이었다. 내 삶의 의지를 꺾은 건. 

전문의 따고 생애 첫 주식 계좌(2011) 열어 마이너스 통장 3000만원을 포함한 전 재산 8000만원 다 잃었을 때나 서울대병원 근무하며 은행 빚 1억원까지 끌어모은 전 재산 3억원 대부분을 주식으로 날렸을 때(2017)가 아니라, 그로부터 1년 뒤 "이거 사면 대박"이라는 한 친구 말에 홀려 또 주식에 손댔다 실패했을 때 무너졌다. 손실은 전보다 훨씬 적었지만, '다시는 주식 안 한다'는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는 자괴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울 강남역 삼성전자 사내 진료소 근무 시절, 정신과 의사 역할을 제대로 하기는커녕 어두운 표정에 근무 태만으로 모두의 걱정거리가 됐다. 그렇게 또 잘렸다. 서울대병원 관두고 월급 후한 곳 찾아 간 전주의 한 병원에서 해고당한 걸 포함해 세 번째였다. "이제 의사 못 하겠구나, 쓸모없는 인간이 됐구나, 인생 글렀다. " 돈만 날린 게 아니라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인간이 됐다는 생각에 살기 싫었다. 

살 용기가 없었지만 죽을 용기는 더 없었다. 강남역 오피스텔 13층 창문의 나사를 풀고 반쯤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 때문에 애먼 사람 다치면 안 된다고, 사람 없을 때 기회를 보자고, 되뇌었다. 이제는 안다. 죽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조차 실은 살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다는 걸. 무섭고 억울하니 결심을 미룰 핑계를 자꾸 만든다. 

지난 2018년, 주식 투자 1000만원을 잃고 삶의 의지를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친구 홍식이(오른쪽)는 나를 다시 일으켜세워줬다. 홍식이가 근무하던 대구에 내려가 같이 찍은 사진. [사진 박종석]

지난 2018년, 주식 투자 1000만원을 잃고 삶의 의지를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친구 홍식이(오른쪽)는 나를 다시 일으켜세워줬다. 홍식이가 근무하던 대구에 내려가 같이 찍은 사진. [사진 박종석]

새벽 3시, 거리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휴대전화를 열어 저장된 순서로 전화를 돌렸다. 아무도 받지 않았고, 콜백을 주지도 않았다. 전에 의대 동기 한 사람한테 "30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가 차갑게 거절당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소문을 낸 모양이었다. 하기야 매달 생활비 보내드리던 엄마한테 "너무 힘들다"고 연락했을 때도 차마 내 괴로운 속사정을 다 털어놓지 못했다. 괴로웠다. 부모도 안 듣는 내 얘기를 누가 경청하고 나를 도와주겠나. 

중학교 동창인 정신과 전문의 노홍식만은 달랐다. 원래 그렇게 친하지 않았고, 몇 년 전 정신과 학회에서 우연히 만나 번호를 받고도 연락 한 번 안 했다. 그런데 전화를 걸었더니 이내 답신이 왔다. 당시 대구의 한 병원에 근무하던 홍식이는 날 밝을 때까지 내 말을 들어줬고, 위험신호를 감지했는지 "당장 대구 우리 집에 오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살았다. 내 얘기를 들어준 단 한 사람 덕분에.  

지푸라기의 힘

홍식이는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도 밤새 얘기 들어주고, 자기 집에 불러 며칠을 재우고, 집 근처 병원에 일자리 구하게 해 퇴근하면 밥 먹이고 운동시키고, 전화 안 받으면 문 두드려 날 집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가 없었다면, 주식 투자를 빙자한 주식 도박에서 빠져나오지도, 빚 갚고 병원 개업해 중독 치료로 이름을 날릴 기회도 없었을 거다. 

다시 말해,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있을 때 나를 살게 한 단 한 사람이었다. 내가 특별히 가치 있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서도 아니다. 이젠 절친이 됐지만, 그땐 별로 가깝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성심껏 도왔을까. 물론 그가 원래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우리 둘의 관계를 넘어 사회적 선의가 돌고 돌아 나에게 닿은 거라 믿는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겪는 인간을 위해 과거 누군가 그에게 해줬듯 그도 선뜻 지푸라기가 돼줬다. 

흔히들 가능성 희박한 헛된 희망을 얘기할 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라고 하는데, 겪어 보니 그 아무것도 아닌 지푸라기 때문에 산다. 자기는 본인밖에 도울 수 없는데, 지푸라기가 있기에 거기까지 헤엄쳐가고 그 힘으로 결국 뭍에 올라선다. 그때 깨달았다. 열등감에 빠져 세상 원망만 했는데, 홍식이의 지푸라기만큼은 아니더라도 문 잡아주는 낯선 이의 친절과 같은 '별거 아닌 굉장한 배려'를 일상에서 매일매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선의가 쌓여 나를 일으켰다. 홍식이에게 평생 은혜를 갚을 생각이지만, 꼭 그가 아니라도 다른 이의 지푸라기가 돼 대신 갚을 수도 있다. 

피를 무서워한 탓에 적응을 잘 못 하던 연대 의대 시절 멘토로 만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김병후 박사님(왼쪽)을 최근 출판기념회에서 만났다. [사진 박종석]

피를 무서워한 탓에 적응을 잘 못 하던 연대 의대 시절 멘토로 만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김병후 박사님(왼쪽)을 최근 출판기념회에서 만났다. [사진 박종석]

일찌감치 의대 때도 지푸라기가 있었다.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 정신과 전문의 김병후 박사님이다. 당시 연대 의대는 적응 못 하는 학생에게 정신과 상담과 멘토를 붙여줬는데, 그렇게 김 박사와 만났다. 그는 "나도 적성에 안 맞아 성적 나쁘고 항상 겉돌았다, 의대 온 문과형 인간은 다 정신과 간다"며 정신과를 권했다. 그 조언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지난해는 다들 힘들었지만 특히 청년들이 어려웠다. 그런 이들에게 꼭 해줄 얘기가 있다. 인생을 바꾸는 계기는 행운이 아니라 결심에서 온다는 뻔한 조언 말이다. 월급 통장을, 정치를 바꿀 수는 없지만 일상은 바꿀 수 있다. 단정하게 입고, 5분 일찍 일어나고, 성에 덜 찬 회사도 열심히 다니면 분명 다른 삶이 펼쳐진다. 

주식이든 코인이든 한 방에 인생 역전은 없다. 나처럼 완전히 망해 죽다 살아나서야 이걸 깨달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