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최상목 '재판관 임명' 결단 뒤엔, 이창용 조언 있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추가 임명은 고독한 결단일까, 누군가의 조언일까.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가동에 길을 터준 최 대행의 지난달 31일 결정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정통 경제 관료로서 정치적 부담이 큰 행동을 여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다는 게 쉽게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일 최 대행의 재판관 임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정치적 중립이 생명인 한국은행 총재로선 극히 이례적인 발언이다. 이 총재는 지난달 하순 최 대행이 당시 한덕수 권한대행에게 재판관 추가 임명을 건의하러 갔을때 최 대행과 동행했던 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2025년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뉴스1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2025년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뉴스1

 
이 총재는 이날 한국은행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읽던 중 “여러 간부가 말을 더하지 말랬는데 읽다 보니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며 작심 발언을 시작했다. “최 대행의 재판관 임명 결정에 대해 비판을 할 때는 최 대행이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답도 같이 하시는 것이 좋겠다”며 “특히 국무위원은 그런 비판이 해외 신용평가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해주셨으면 한다. 신용등급은 한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기 굉장히 어렵다”고 했다. 

이미 신년사 원고에 “최 대행의 결정은 우리 경제 시스템이 정치와 독립적으로 정상 작동할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출발점” 등의 내용이 있었지만 즉석 발언을 추가한 것이다.   

이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최 대행은 공직자로 차후에 나중에 매우 크게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이 총재의 예상밖 발언을 두고 재정당국 관계자는 중앙일보 통화에서 “양극단으로 쏠린 여야가 최 대행을 마구 흔들며 국가 신용등급이 하락할 갈림길에 선 상황이지 않나”이라며 “최 대행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이 총재가 중간지대의 ‘침묵하는 다수’로서 더는 머물 순 없다고 작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라가 두쪽으로 쪼개진 상황에서 ‘경제 투톱’ 연대라도 기능해야 하지 않겠나”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 총재는 헌법재판관 임명 과정에서 최 대행의 주요한 조력자로 역할했다. 최 대행과 막역한 정치권 인사는 “재정·통화 양대 수장인 최 대행과 이 총재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더 긴밀히 소통해 온 것으로 안다”며 “특히 불확실성이 계속될 경우 대외 신인도 하락과 외환 위기가 닥칠 수 있어,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일정을 조속히 확정 지어 줘야 한다는 데 명료한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소통 과정에서 이 총재는 ‘재판관 2명 임명’ 방안을 미리 접했고, “법률적인 문제도 잘 검토하셔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최 대행과 이 총재가 소통을 이어 온 거점은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함께하는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F4 회의)였다고 한다.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소집된 F4 회의에서 최 대행이 사의를 표시하자 이 총재는 “경제 사령탑마저 물러나면 당장 국가 신용 등급이 추락할 것”이라며 극구 만류했다. 이어 일주일 뒤 한국은행을 방문한 야당 의원들에게 이 총재는 “(최 대행이) 계엄 선포 전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결정에 반대하고 뛰쳐나왔다고 들었다”는 뒷얘기를 소개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7일 오후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를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덕수 국무총리가 27일 오후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를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애초에 이 총재가 최 대행에게 한덕수 총리를 직접 찾아 (재판관 임명을)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던 인물 중 하나였고, 경제 심각성을 알리려 동행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 총재는 한 총리와도 하버드 대학 대학원 동문으로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9월 3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앙동 기획재정부 입구에서 만나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9월 3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앙동 기획재정부 입구에서 만나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 총재는 최 대행의 서울대 2년 선배다. 전공은 달라 학창 시절엔 연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 총재가 서울대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기획재정부와 교류 과정에서 당시 서기관이던 최 대행과 친분이 시작됐다. 공적 영역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하게 된 건 윤석열 정부 들어서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런 이 총재 행보에 대해 “중립성이 핵심인 한은 총재가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부적절하다”(국민의힘 관계자)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주변에 “다른 선진국 중앙은행은 행정부와 상당히 긴밀한 소통을 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더욱 중립적 결정을 내린다. 유달리 우리나라만 관행적으로 정부와 소통을 안 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총재는 지난해 9월 한국은행 총재로선 처음으로 기획재정부를 직접 방문했다. 

한편 최 대행은 지난달 31일 국무회의 직전까지도 ‘선 쌍특검 거부권-후 헌법재판관 임명’ 방식을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작 두 안건을 같은 날 의결한 것은 “재판관 임명에 시차를 뒀다간 정치권에 더욱 휘말려 ‘경제 관료’로서 결단할 기회를 영영 놓치겠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국무회의 전날 저녁부터 “재판관 임명을 하면 안 된다”는 여권의 전방위적 압박이 심했다고 한다. 익명을 원한 정부 관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여권 압박이 최 대행 결단을 유보하긴 커녕 더 당기게 된 꼴”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