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87’ 길을 묻다
12·3 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권력자 개인의 과오만큼 ‘87년 체제’의 불완전성을 고스란히 노출했다는 평가다.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에 주요 정치인의 의견을 릴레이로 전달한다. 여덟 번째 인터뷰는 무소속 김종민 의원이다.
김 의원은 야권의 대표적 개헌론자 중 하나다. 21대 국회 때 더불어민주당 정개특위 간사였고, 22대 들어서는 우원식 국회의장 직속 개헌 특별자문위원이다. 김 의원은 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온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건 그 나라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며 “이번 계엄으로 대통령의 권한, 나아가 국회의 권한까지 모두 분산할 필요가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당장 뭘 중심으로 개헌을 논의해야 하나.
12·3 계엄 선포 과정을 보면 답이 나온다. (1948년 만들어진) 제헌 헌법에는 원래 비상계엄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가 국무회의의 의결권을 심의권으로 격하시켰다. 87년 개헌 때 복원했어야 했는데, 6월 항쟁→12월 대선으로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때 제대로 바꿨다면 이번 계엄은 국무회의에서 부결됐을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가장 큰 문제라는 뜻인가.
가장 중요한 건 ‘통치자 개인이 마음대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수 없게 하는 장치’가 헌법에 담겨야 한다는 점이다. 임기나 내각 구성 방법이 어떻게 되든 대통령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왕정과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이냐 총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민주적 총리, 민주적 수상, 민주적 대통령, 민주적 국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구체적인 대통령 권한 축소 방안은.
첫째는 정부 구성이다. 한국 대통령제가 제왕적이 된 건 장관 등 국무위원을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어서다. ‘인사권이 고유 권한이니 건드리면 안 된다’는 주장은 왕정에서나 가능한 말이다. 장관 청문회만으론 대통령의 자의적 인사를 막지 못한다. 미국만 해도 대통령이 장관, 차관은 물론 각국 대사들까지 상원 인준 없이 임명하지 못 한다. 대통령이 ‘의회를 설득할 수 없는 인사는 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게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국정 비효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비효율이라는 지적 자체에 ‘왕정이 효율적’이라는 낡은 생각이 깔려있다. 효율이 능사면 왕한테 권한을 다 주면 되지, 제도를 왜 만드나. 대통령이 정부를 혼자 구성할 수 없게 해야 김건희니 최순실이니 하는 비선 실세 논란도 종식된다.
장관 국회 인준 외 나머지 하나는 뭔가.
한국 정치가 무한 정쟁, 양극화한 근본적 원인이 승자독식의 정치 구조다. 대통령 권력을 잡는 순간 수사·재판·방송을 장악하고 싸우려 한다. 이 싸움이 10여 년 넘게 지속 중이다. 싸움의 진원지인 수사·기소·재판·감사·방송 등 권력기관을 정권이 계속 이용하는 게 맞나? 이제 대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관, 검찰총장, 경찰 국수본부장, 공수처장, 방통위원장, KBS 사장 이런 자리들에서 대통령이 손을 떼야 한다. 정치적 중립이 필요한 이들 기관의 수장을 ‘국민 참여 인사 추천제’로 뽑아야 한다.
참고할만한 선진 사례가 있을까.
유럽 일부 국가의 사법 평의회나 판사추천위원회 등이 있다. 미국에서는 검찰총장도 선거로 뽑는다. 특정 제도를 그대로 따라간다기보다 한국 실정에 맞게, K-민주주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내각제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적잖은데.
본질적으로 내각제가 보다 민주적 제도지만, 헌법은 국민이 합의해 만든다. 헌법은 국민(주권자)-국가 간 권력 위임 계약서다. 국민들이 대통령제를 원한다면, 민주적인 대통령제로 만드는 게 우선이다. 임기 문제는 정치권이 4년 중임제를 오래전부터 논의했고, 현재로서 가장 합리적 방안이다. 다만 제왕적 요소를 놔두고 4년 중임제를 한다면 헌정사상 최악의 국면으로 가게 될 것이다.
170석 정당이 대통령까지 배출하는 건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회 권력의 민주화도 필요하다. 단일 대오를 추구하는 양당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던 검투 경기와 무엇이 다른가. 민심이 다양하게 반영하는 국회가 돼야 한다. 최대 다수의 민심이 반영되는 선거로 총선을 바꿔야 하는데,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하면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현행 소선거구제를 50대 50으로 반영해 의회를 구성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21대 국회에서 그걸 논의했지만 결국 비례 위성정당이 나왔다.
당시 정개특위는 225명(지역구) 대 75명(권역별 비례대표) 혼합선거구제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막판에 ‘지역구를 못 없애겠다’는 기득권 논리가 고개를 들어 최악의 선거법이 탄생했다. 공개적으로 끝까지 반대하지 못해 국민들께 죄송하기도 하고 회한이 남는다. 향후 최소 4~5개 정당이 공존하는 다당제가 보장되는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들기 위해 힘쓰겠다.